2021817일 화요일, 흐림


빵고 신부는 먼저 AZ 백신을 맞았고 이번에 화이자로 교차접종을 했다는데 엄청 몸살을 했나 보다. 늘 바빠서 평상시에 전화해오는 일도 드물지만 내가 전화를 해도 잠시 후 제가 다시 걸게요.’ 하고는 묵묵무답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월요일에 나도 2차 접종하는 줄 아니까 안부 차 했는지 전화가 왔다. 아들 목소리는 무슨 일로 언제 들어도 엄마에게는 여름날 시원한 물소리나 바람 소리 마냥 듣기만 해도 기분 좋다.


어려서도 무척 순한 아가였다. 몸이 아파도 떼쓰거나 칭얼대는 일 없이 그냥 잠만 잤다. 웬일인가 열을 재면 머리가 펄펄 끓곤 했다(그래서 가와자키병으로 큰일 날뻔한 적도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만성 맹장염을 잃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적도 있다). 욕실에서 대야나 욕조에서 바가지로 물장난을 하다가 지치면 타일 바닥이나 깔판 위에서 졸거나 자기도 했다


'쟤가 얼마나 순한 어른이 될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요즘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쟤가 저런 모습의 사제가 되려고 그랬을까?' 하며 슬그머니 웃는다. 아무튼 순한 남편에 이어 순한 아들 둘을 하느님께 배급 받아 탈없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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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려서 너무 악다구니여서 지치고 짜증난 엄마한테서 "너같은 딸 꼭 열만 낳아라!"는 저주 아닌 저주를 듣고 했는데 엄마의 저주가 진심이 아니었든지 딸은 낳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흘릴 눈물을 어려서 다 흘려선지 나이 들어서는 흘릴 눈물이 더 이상 안 남은 듯하다. 눈물이 안 남아서 인지 울 일도 안 생긴다그 대신 배도 안 아프고 키우는 고생도 않고 늘그막에 딸을 넷이나 얻어 마냥 웃을 일만 생기고 있다


어제 백신을 맞으러 오후 1시에 읍내 병원엘 갔더니 젊은이부터 나 같은 노인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첫 번 주사엔 노인들만 와서 한가하고 주사도 AZ 백신 한 가지였는데, 이번엔 화이자, 모더나까지 있어 연령대에 맞춰 각자가 맞아야 할 약품명 스티커를 문진표에 붙여 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우리 정부의 코로나 대처에 치밀하고 섬세함에 나도 찬사를 보낸다. 이렇게 해서 전세계가 ‘Corona-K’라는 찬사를 보낸다는데, 우리나라 보수 언론만 오로지 트집 잡고 욕할 거리만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니! 칭찬에 가난한 사람들은 인생 자체도 빈곤 속에 허덕일 게다. 보스코도 읍내에 함께 가서 이발을 하고 나는 장에 들러 몇 가지 채소 모종을 사다 저녁 나절 텃밭 빈자리에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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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는 보스코가 배를 좀 땄다. 적성병이 너무 심했고 꽃이 만개할 때 냉해가 와서 얼마 안 달린 배를 보스코가 거의 솎지도 않고 그냥 쌌더니만 아직도 갓난아기 주먹 만한 크기로 알이 너무 잘다. 게다가 이 산골과 동네 사는 모든 조류가 호시탐탐 배를 노려서 어른 주먹 크기만으로 잡혀도 그냥 땄다. 껍질이 아직 파래도 씨가 까맣게 익었으면 그늘에서 자가 성숙을 한다는 최요안 선생의 자문을 받았다. 봉지를 열어보면 상당수가 새 부리에 쪼여 썩어가는 중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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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떼를 쫓으려고 허수아비는 생각 안 했고 내 붉은 원피스를 걸어 놓은 허수엄마둘이 바람에 펄럭여도 물까치들이 끄떡도 안 해서 읍내에서 허수매(독수리)’를 한 마리 샀다. 긴 댓가지 꼭대기에 줄을 매고 달았더니만 바람결에 비행하는 모습이 멋지다. 일단 겁이 났는지 오늘 첫날 하루는 새들이 근신중이다. 누구는 '저게 약발이 들까?' 하는데, '새대가리'라는 일반적 오류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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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며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더라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가스불에 냄비 올려놓고 깜빡하는 일'이다. 한번은 사골을 가스불에 올려놓은 채 서울로 출발했다. 아래층 진이엄마가 우리 식당채에 가득한 연기 냄새에 놀라 가스불을 끄기는 했지만, 진이 엄마가 없었으면 휴천재를 홀랑 태워먹을 뻔했다한겨울에 추워도 문을 열어 한 동안 노린내를 빼야 했다


이런 노인네들을 위해 군청에서 경비를 지원해서 '가스안전기'를 달아준다는데 요행히 우리집도 지정을 받았다. 오늘 오후 2시 경 남정 둘이 와서 서너 시간 고생 끝에 쇠파이프 배관과 안전기를 달아 주고 갔다우리 마을 사람 대부분이 80을 넘나드니 필수적인 지원사업을 정부가 제공하는 셈이다. 세금을 내도 아깝지 않은 이유가 피부에 와 닿고 우리 부부의 큰 걱정 하나를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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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다섯 시 경 드물댁이 올라왔다. 텃밭에 비닐을 멀칭하잔다. 내일은 자기가 백신을 맞으니 한 이틀 쉬어야 해서 못 돕고, 그 다음날부터는 가을장마라고 들었단다. "비가 너무 오면 땅이 질어서 씌우는데 힘들고, 씌워도 물기가 많으면 씨앗이 썩는다"는 가르침도 내린다


어제 백신을 맞은 터라 나도 오늘 하루 쯤은 쉬려던 참인데, 몸이 너무 멀쩡해서 꾀를 부릴 수도 없었다. 짤따란 이랑 아홉(그 중 셋은 드물댁의 몫)을 두 여자가 열심히 씌우니 바람은 살랑살랑 불지요 깔따구도 봐주는지 물것이 없지요 해서 일곱 시 반 경 일이 끝났다. 드물댁이 나를 흐뭇이 지켜보면서 "갈켜 놨더니 이젠 제법 잘 하네."란다. "스승님, 그러면 이제 하산 해도 되남요?" 지리산 휴천재 텃밭농사 스승께서 괜찮다면 하산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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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랑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동네 소식을 제법 듣는다. 사람들 얘기는 물론이고 '덕산댁 염소 장례식' 얘기까지. "염소는 워낙 승질이 고약해 너무 더우면 죽어삐린다." "덕산댁하고 나하고 염소를 자루에 담아 손수레에 싣고 강건너로 끌고가서 땅을 파고 묻어줬다." "뭔놈의 염소 무겁기는 겁나 무겁고, 땅은 왜 그리 깡깡하던지..." "올 여름 들어 벌써 세 마리 째 죽어 그 집 염소 싹 죽어삐맀다." 


"이젠 묻을 것도 더 없어 씨원할끼고만. 그래도 내년이면 덕산댁 뭔가 또 키울 끼다." 내 생각에 저건 건망증이 아니라 외로워서다. 개고양이도 닭이나 염소도 혼자 사는 아줌마들이 적적해서 키우는 '반려동물'이다. 다만 나이 들어 자기 한 몸 추스리기도 어려워져 이 시골 마을에서도 닭 우는 소리는 아예 못 듣고 개 짖는 소리도 몇 집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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