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10일 화요일. 기다리던 비, 소나기


세동댁은 송문교 앞 귀퉁이 손바닥 만한 밭에 온종일 눌러살다시피 한다. 봄이면 감자, 여름이 시작되면 고추가 땅을 차지하고, 주변 자투리 땅엔 땅콩 한 고랑, 고구마 반 고랑, 신작로가 시작되는 삼각형 조각 땅에는 호박을 심었다. 호박넝쿨이 은근히 옥수수 울타리를 넘어 차도에 널부러져도 차들이 피해간다. '내가 차지한 대로 전부 내 땅.' 참깨는 태풍이 오기 전 벌써 베어져 송문교 다리에 일렬 횡대로 사열 중요즘은 거의 매일 비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 해가 쨍쨍할 때도 송문교 깻단은 비닐을 머리까지 쓰고 서 있다


가난이라는 의상이 그미(헤드빅 수녀님한테서 '헤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에게는 제일 만만한 듯, 몸에 익어 올이 안 보이도록 헤진 왜바지가 차림의 전부여서 그미 가까이 가면 내 차림이 되레 어수선해 보인다. 꾸미려는 욕심을 무장해제시킨달까? 그 땅에 얼마나 성과 열을 기울이는지 동네아짐들이 다 대견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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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데크에 피어오른 수세미꽃, 그 잎에서 네 발(8) 뻗고 자는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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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산보는 보스코가 문상마을 지나 돼지막 쪽으로 걷자 했다. 송전마을을 갔다 오면 7000, 문상만 돌아 내려오면 3500, 그래서 돼지막 쪽으로 걸으니 만보기에 5000 숫자가 보였다. 그쪽으로 걸으면 좋은 것 한 가지에 나쁜 것 한 가지. 나쁜 것은 여름 더위에 돼지똥이 발효하는 냄새. 얼마나 지독한지 머리가 어질하고 숨쉬기조차 힘들다


그래도 그곳에서 일하는 제3세계 청년들은 저 악취를 참으며 거기서 숙식을 하는 중이다. 그렇게 몇 년 고생하고 나면 고국 땅에 집 한 채라도 생기고 몇 년 더 고생하면 가게라도 열어 평생 가족 먹여 살릴 길이 생긴다나? 그러니 돼지가 그들에게는 희망이 된다너무 심한 무더위에 일사병 같은 병을 얻어 저 가냘픈 희망이 꺾이는 일 없기를 축원한다. 돼지막엔 대형 환풍기가 소음을 내며 돌아가지만 이 살인적인 무더위에도 그들 숙소에 에어컨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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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진이아빠도 한때 서울 난지도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비료로 만드는 지인의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우이동 우리 집에 묵으면서 공장을 다녔는데 그가 귀가하면 집 전체에 음식 쓰레기 처리한 냄새가 풍기곤 했다. 출퇴근 길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멀리 물러나 편히 앉아가서 좋더라는 그의 씁쓸한 농담이 기억난다그렇게 고생하다 주말이면 티코를 몰고 그리운 처자식이 기다리는 함양(휴천재)을 다녀오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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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산보길을 내려오면서 좋은 점은 유영감님 납골묘가 있어 기도로 인사하고 조금 더 내려오면 허씨노인 안사람('라파엘라'라고 불러준다) 묘지도 있어 똑같이 주모경을 바치고 지상에 남은 아저씨도 생전에 영세 받게 하늘에서 손쓰시라고 빌었다. 허노인이 영세하면 '라파엘'이라고 불러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부인 묘에는 잔디가 말끔히 잘 손질되어 있었다(남편이 부부묘로 마련한 가묘였는데 부인이 먼저 가는 바람에 라파엘라의 화장한 유골은 봉분 한 모서리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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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가 넘어 퍽 어두운 시각, 드물댁과 소장댁, 그리고 세동댁이 송문교 옆에 나란히들 앉아 있었다. 세동댁네 밭에 아들이 앉혀준 컨테이너 속의 건조기에서 고추를 말리는 중이어서 한 시간 쯤 친구 해주는 중이란다. 산골에서는 겁이 많아선지, 야간조명이라곤 등잔불 밖에 없이 자라던 사람들이어선지 해가 지면 여간해선 담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특히 아낙들은.


20여년전, 밤이면 누군가 밖에서 불러낸다며 집에 있지를 못하고 이웃으로 잠동냥을 다니거나 무작정 신작로를 배회하던 어느 아짐(얼빗댁으로 기억난다)은 기어이 연화동에서 뺑소니차에 치어 신작로 마른 도랑에 죽어있었다. 며칠을 두고 그 아짐의 행방을 찾다 포기한 마을사람들이 소나무 가지에 덮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이라도 찾아낸 것은 여러 달 지나서였다. 운전석이 높다란 군내버스 기사가 그 도랑에 뭔가 이상한 물체가 있음을 보아서 찾아낸 시신이었다. 그렇게 비명에 간 여인의 유령이 어슬렁거릴까 밤이면 으스스하다는 세 아짐들의 납량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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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는 보스코랑 텃밭으로 내려가서 부직포를 걷어내고 출산과 육아를 마친 옥수수대를 베어냈다. 밭마다 농작물도 가믐을 타고 풀들도 바싹 말라가는데 오늘 아침나절에도 예보된 비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 낌새가 안 보인다보스코는 베어낸 옥수수대에 아직도 업혀 있는 막내 옥수수들을 꺾어내 껍질을 벗기면서 혼잣말. "늙은 할미 어린 손주 춥다고 마냥 껴입히듯, 이 어미는 옥수수마다 열 벌이나 속옷을 입혔네?" "... ..."


무씨도 사야 하고 거름 나를 손수레도 필요해서 읍내에 나갔다읍내 농기구 가게에서 "바퀴 하나 짜리 수레를 살까 두 바퀴가 좋은가?" 보스코에게 전화를 했더니, 휴천재에 소나기가 엄청 쏟아지고 있단다! 빨래도 널어 놓았고 고추도 말리던 중인데 거의 다 말라가던 두어 근 태양초가 그만 흠씬 젖었더라나? 


집지키던 보스코는 깜빡 낮잠이 들었다 소나기 소리에 깨어보니 젖을 건 이미 다 젖었더란다. 남자들은 머리 속에 어떤 회로가 있을까? 회로를 타고 흐르는 전기가 여자보다 두 배 쯤 느려 무슨 사태가 발생하면 퍼뜩 깨닫고 서둘러 조처하는 시간이 여자보다 두 배 이상 걸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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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왔겠다, 오늘 새벽에 부직포도 걷어냈겠다, 옥수수대도 베어냈으니, 여자 머리는 자동으로 다음 단계 작업으로 옮겨간다: '잉구씨더러 우리 텃밭 로타리 쳐달라 부탁하려면 퇴비를 깔아야겠다!' 다행히 드물댁이 지나가다 들러 둘이서 거름푸대들을 날라다 이랑들에 쫘악 깔았다. 두어 시간 땀흘리고 올라오니 '성나중씨' 보스코가 립서비스를 한다. "내일 아침에 내가 거름을 깔 생각이었는데..." 낫질을 하다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낭자한 손을 그에게 내밀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전순란의 인생철학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 아무튼 이제 휴천재 텃밭은 '친절한 잉구씨'가 로타리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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