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8일 일요일. 흐림


오늘은 정말 할 일이 하나도 없는데 습관처럼 텃밭엘 내려간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쿠리는 꼭 비상용품. 하루 사이에도 고추는 많이도 붉었고 방울토마토는 색전등 줄처럼 빨갛게 켜져 있다. 빨개지면 무조건 맛을 보고마는 물까치들한테 한입 찍힌 토마토는 스스로 썩을까 익을까를 두고 톤론중인가 보다. 봉재언니가 작년에 준 참외 모종을 작년엔 한 개도 못 따먹었는데, 거기서 떨어져 싹을 티운 '개똥참외' 한 포기가 밭고랑을 차지하고 조랑조랑 야무지게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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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월에 토란 골에 두어알씩 박은 옥수수를 시작으로 가운데 고랑, 그 옆 고랑, 배나무 밑, 그리고 텃밭 입구 등 땅만 보면 옥수수 알을 (물까치 모르게) 슬그머니 묻어 두었더니 염치 없이 많이도 싹트고 자라서는 원 없이 열렸다. 먹는 사람 우리 둘의 식성이 옥수수 열리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 올핸 실컷 먹고 남아 특히 진이네랑 부지런히 나눈다. 붉은 고추도 한 소쿠리 따고 가지와 방울 토마토, 오이, 옥수수도 따서 오늘 대구에서 엄마 드물댁의 건강검진을 해드리고 모셔온 대구 큰딸과 셋째에게 싸 주었다. 읍내 가서 장봐 올 모든 목록이 우리 텃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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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미처 봉지로 싸주지 못한 배는 물까치들이 깨끗하게 먹어 치워 이젠 봉지 속의 배를 노리는데 배가 익는 냄새를 풍기면 사정 없이 봉지를 찢고 먹어 치울 차례다. 미루가 일러준 대로 '만루포'라는 약을 좁쌀에 섞어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새들이 쪼아 먹던 배봉지 옆에 달아 두었다. 물까치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극단의 조치를 취하는 중이지만 이상기후로 조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이 시점에 약을 매달면서도 마음은 안 좋다


누구는 농사지은 것을 산짐승들, 새들, 벌레들과 나눠 먹으라지만, 휴천재 배농사의 경우 저것들과 나누는 게 아니고 서른 그루의 배나무에서 작년에 단 한 상자도 안 남은 터라 독하게 마음먹고 '까치밥' 내지 '까치약' 봉지를 매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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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체칠리아가 무씨를 심었다기에 그제 새벽에 보스코더러 부직포 덮은 두 고랑을 벗기게 시키고서 우리 구장한테 무를 언제 쯤 심을까 물었다. "남 심을 때 심으라"는 명답이 나왔다. '요즘처럼 뜨거운 날씨에 씨를 심으면 흙 속에서 익어버린다', '빨리 심어 크게 키우겠다고 욕심이 앞서면 태풍에 무싹이 녹아 버리고 웃자라도 너무 커서 맛이 없다'는 가르침도 전수해준다.


4단계 격상으로 미사도 공소예절도 금지된 터라 유튜브 영상으로 '미사를 보고' 신령성체를 했다. 미사 참례와 영성체에 신앙생활을 몽땅 거는 구교 신자들은 성당 못 가고 영성체 못하면 맘 속으로 성체를 모신다는 '신령영성체(神領聖體)'를 한다. 개신교 출신인 내게는 '먹은 셈 치고'처럼 들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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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입에서 '빵' '빵' '빵'이 무려 여섯 번 가량이나 나왔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야기를 자기 복음 6장에 실컷 실어 놓은 사도 요한이 정작 예수님 최후만찬에서는 성체성사 건립을 삭제해버리고 '사랑의 계명제자들 발 씻기'로 대체한 사실이 의미심장하다는 보스코의 설명도 의미심장하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나누라'는 성체성사의 본뜻(사회복음)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기'(개인신심)로 집중되었다는 안타까움이다.


Gruppo di S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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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 Cime di Lavar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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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go Misu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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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네는 돌로미티 알프스에서 휴가를 마치고 제네바로 돌아갔다. 아들이 보내주는 돌로미티의 사진들, 셀라 그룹의 위용, 미수리나 호숫가, 트레치메 라바레도의 영봉은 추억이 깊다. 그곳에서 한여름을 함께 지내던 이탈리아 친구들, 이미 세상을 떠난 지인들이 그립다. 


오늘 저녁에도 논둑 사이를 걸어 내려가 송문교를 건너 송전 가는 길을 걸었다. 그동안 한길 옆에 집만 지어 놓고 인기척이 없던 별장들에도 인기척이 보이고, 삼겹살 굽는 냄새와 연기가 나고, 강물에서 놀다 온 모양새로 사내들 옷가지들이 산만하게 빨랫줄에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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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 속의 알프스(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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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노인들이 대부분인 우리 동네엔 '자손들이 다니러 오는' 기색이나 자가용들이 안 보인다. 당산나무 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던 임실댁이 "우리 사우와 딸이 산청 시집에 다니러 왔는데 온 길에 친정에 다녀 가겠다기에, '이장이 외지사람 못 오게 했다. 그냥 올라가라!' 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최근 들어 함양에 확진자들이 왕창 늘어나고, 주민 대부분이 80살 안팎에다 거의 기저질환이 있는 노인들이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4만명 가까운 함양 군민 전부에게 읍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하라는 방송차가 하루에도 너댓번씩 마을을 돌아다닌다.


산봇길에 내 옷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보스코가 "당신 옷솔기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 옷 바로 입은 거야?" 묻는다. 오늘 해가 하도 뜨거워 테라스에 널면서도 검정옷이라 햇볕에 바랠까 뒤집어 널었다가 그대로 입고 나왔더니... "으응, 오늘 뒤집어 벗어 놓으면 내일은 바로 입을 꺼야."라고 얼버무렸지만 남편 눈에 칠칠치 못한 모습을 들킨 듯해서 살짝 부끄러웠다. 강변에 있는 공중화장실(온종일 에어컨이 펑펑 나온다!)에 들러 옷을 뒤집어 바로 입었다. 비 온다던 서쪽 하늘이 밝아오며 넘어가는 해에 불을 지폈다. 참 곱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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