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일 화요일, 흐림


밭에서 거둔 울콩을 타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마당에 널어 말리는 콩깍지를 보스코가 어제 오후 내내 손으로 까더니 (키가 없어) 키질 대신 부채를 부쳐 잡티를 날려보내는 모습이 엄청 진지하다농사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해를 거듭하며 배운다내가 마음 쓰고 노력한 만큼 하늘도 도우시고 나 역시 내 수고한 만큼 뿌듯하다그래서 자연이 인생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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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문화를 만나는 건 늘 두렵다. 아들이 스마트폰을 사준다고 했을 때 굳이 싫다고 사양을 했는데, ‘홀더폰으로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데 쓸데없이 돈만 쓴다는 핑계를 댔다. 새 폰이 왔을 때는 싫은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그 방에도 들어가기 싫었다. 뭔가 복잡하고 터치 하나만 잘못해도 알 수 없는 세계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차츰 새것을 알아가며 특히 유튜브에서 음악과 비데오에 미쳐 밤 서너 시까지 컴컴한 방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잠을 날리기도 했다. 백내장 수술 직후라서 눈고생을 많이 시켰다.


봉재언니는 어머니 때부터 물려받은, 70년은 족히 되는, 발틀 미싱으로 옷도 해입고 호청도 매고 행주도 박으며 잘 써왔는데... 그게 바늘받이부터 내려앉더니 아주 망가져 버렸단다. ‘최소율의 법칙’. 사람도 어느 부분이 망가지면 그것으로 생명까지 잃는데 언니네 재봉틀도 그 시점에서 70 평생을 마쳤다. 할매재봉틀이 돌아가시고 난감하던 언니에게 내가 얼마 전 새 재봉틀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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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기로 돌아가는, 처음 보는 기계여서 언니로서는 난감할 노릇이다. 실을 꿰는 일부터 아는 게 하나도 없더란다. 행여 잘못 건들어 망가질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재봉틀 굴려야 할 일은 쌓여가는데... ‘알면 쉽고 모르면 답답한 일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서 아는 게 힘이라는 속담마저 나온 듯하다.


조카수녀가 내가 준 재봉틀 싱거를 이 브라더미싱으로 바꿔서 돌려주는 바람에 나도 가르쳐 줄 길이 없어 재봉틀박사거창 황신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신부님은 안타갑게도 작년에 뇌졸증으로 쓰러졌지만 가까이 사람들이 있어서 빨리 손을 써서,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눈치도 못 챌 만큼 회복되어 있어서 보기에도 기뻤다


과연 '재봉틀박사'라는 당신 명성대로 신부님은 30분 안에 기계사용법을 완벽하게 다 가르쳐 주었고 80세 학생 봉재언니는 영민하게도 잘도 배웠다. 내가 가져간, 40년 된 싱거재봉틀을 살펴보고는 최고의 컨디션이라고 칭찬했다. 하기야 어제 저녁나절에도 무려 일곱 시간 동안 보스코 바지 두 개, 와이셔츠 네 개, 남방 두 개를 고치고도 끄떡없었으니 나와 생을 함께할 만한 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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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의 한옥짓는 대목 황신부님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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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함양읍에서 만나 거창으로 가기로 한 길이라 우리 마을 정류장에서 군내버스를 기다리던 공소할매를 차에 태웠다. 뒤에 따라온 군내버스가 손님 빼간다고 욕을 할 테지만 버스에 타고 내리는데 십여분씩 걸리는 할매들은 그들에게도 노쌩큐다. 할매도 차부에 내려 안과까지 가는데 택시 타는 번거로움을 피했으니 그게 좋았던지 내년 봄에 양파 한 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문정리 소나타(SONICA) 불법영업올해는 배추와 무 농사가 너무 늦어 양파 심을 틈이 없으리라 염려하던 참인데 잘 됐다


공소할매와 주고 받는 얘기 중에 독일로 귀국하신 헤드빅 수녀님과 모니카 수녀님을 회상하면서 치매 걸렸던 헤드빅 수녀님이 그래도 83세로 세상을 뜨자 친구로서 마음이 놓이더라고 하셨다. 이젠 당신도 (공소 옆집이어서 공소할매라고 부른다) 몸이 불편해 공소예절에 나가길 포기했다면서 동네 아짐들 전부가 죽은 사람이 더 부러운나이라고 한숨을 짓는다. 80대 전후 노인들만 센다면 남자 4명(보스코 포함)에 여자가 20명이니 성비가 1:5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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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튜브에서 들은 노인들의 잘못된 노후의 선택'이라는 강좌에서 재수 없으면 120까지 살 수도 있다는 말이 섬뜩했었다. 막연하게 나이 80 정도를 예상하고 그럭저럭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다 조용히 잠들 듯 떠나려니 하지만 장수가 복이 아니고 짐이 되는 사람들이 이미 주변에 너무 많다. 더구나 자식이 노후다!‘라며 사업 차려주고 집사주고 하다 경제적으로도 노후파산을 하고서 고생하는 사람들! 빈곤과 치매나 중환에 여러 해를 시달리다 요양원에서 고독하게 죽어가는 노년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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