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2일 목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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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아침 9시에 우이동 집을 떠나 난곡의 치과에 들러 전주에 본을 뜬 인공치아를 장착했다. 송곳니를 뺀지 3개월 반 만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임플랜트를 완료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입인데 그 큰 입을 가능한 한 한껏 벌리고 온갖 장비를 들이밀고 캐고 파내고 철심을 박는 공사를 하니 시공자 의사가 무엇을 어찌 했는지 도모지 모른다. 아마 이를 뺀 날 바로 뻣가루를 심고 쇠심을 박고 꿰맸을 게다. 이를 가는 소리는 왜 그리도 큰가! 갈고 파고 문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치아와 가장 가까운 귀에 전달되고 그것이 전류로 바뀌어 두뇌의 청각에 감지되면 온몸은 긴장하여 전율한다.


칫과에서 찍어 보여주는 파노라마 사진에서 내 두개골 치아 부분은 온통 귀금속 내지 중금속으로 하얗게 반짝인다! 오늘 아침기도 후에 읽은 양신부님의 복음묵상을 보면 바울로 사도 시대의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매물로 나온 가축이기에 가축을 사가는 매입자는 인간 가축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입을 벌려 치아를 살피고 근육의 탄력, 피부 등 모든 생물학적인 것을 세밀히 살핀 후 노예주인과 흥정을 시작했단다.


보스코의 석줄로 난 형편없는 뻐드렁니를 보면, 그에게서태어난 빵기도 시아도 닮았다는 점에서 결혼은 먼저 신랑의 치아상태를 일단 점검하고서 했어야 하는데... 미인에게 어울릴 하얗고 단아한 내 치아지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이빨공사로 시간과 돈을 탕진했던가! 돌이켜 보면 신랑치아의 외관보다 신부치아의 경제적 부담이 훨씬 더 심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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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9시에 서울집을 떠나 치과에 들르고 휴천재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5. 여덟 시간을 운전한 셈인데 조수석에서 자다가 졸다가 하던 보스코는 도착하자마자 피곤하다며 길게 누워서 배달되어 있던 15일자 가톨릭신문을 펴 읽는다. 지난 5일에 있었던 학술상의 기사가 이번호 1면과 7면 전체에 떠 있다. '시상식 요모조모'란에서 기자의 감각은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장면을 놓치지 않았고, 작은아들 빵고신부의 멘트도 한 줄 실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9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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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많은 운전기사에게서는 피곤도 도망간다당장 텃밭에 내려가 배추와 무의 안부를 물었다. 가을 가믐이 심해서 배추 속이 차지 않는다는 옆밭 구장의 탄식이다. 채마밭에 가물자 배추에 일일이 물을 주는 대신에 밭고랑에 물을 댄다. 시들어 가던 쪽파도 덕분에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가을이지만 우리 텃밭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올 겨울 상추와 쑥갓을 심으라고 두상이 서방님이 선물한 2미터 짜리 비닐온실도 보스코가 설치했다. 이렇게 텃밭에서 가을걷이를 마쳤으니 배추와 무를 거둬 김장을 하고나면 겨울이 와도 끄떡없다.


어제 아침에는 몇 달 만에 제네바 손주들에게 소포를 부쳤다. 스텔라씨가 선사한 마스크들, 애들이 좋아하는 과자들, 나물 말린 것 몇가지를 넣고나니 상자가 채워진다. 평소 같으면 우리 부부가 스위스를 다녀왔을 해였고 아범도 서너번 출장을 다녀갔을 텐데 다 수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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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며칠 전 내린 된서리에 푹 삶긴 호박넝쿨을 걷어냈다. 스러진 호박잎 밑에는 어린 호박이 아직 몸을 숨기고 살아들 있다. 폭탄으로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어간 엄마의 시신 밑에 빈 젖을 빨고 있는 아랍인 어린것들처럼 서러운 애호박의 생존이다. 비린내 나도록 작은 것들도 다 땄다. 미처 익지도 못한 채 너무 커서 나물도 해먹을 수 없는 중딩 호박은 함양댁 외양간의 염소들에겐 성찬이리라. 설 늙은 호박들을 수레에 싣고 한길가의 함양댁에 갔더니 서리맞은 친구호박 열댓 덩이가 우리 호박보다 먼저 실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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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엔 보스코가 배나무와 자두나무를 감고 오르던 울콩도 마저 거두었다. 그 무성하던 잎은 간 곳 없고 오롯이 깎지만 줄기를 꼭 잡고 매달려 있다. 올봄에 울콩씨 스무 알을 심었는데 커다란 빨래바구니 하나를 가득 채웠다. 밥에다 넣어 먹으라고 진이네, 소담정, 드물댁, 우리집 등 네 집이 나누었다. 몇 끼를 넉넉히 해먹을 양이 나왔으니 하느님이 농사 하나 잘 지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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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옆 논에는 벼이삭이 잘려나간 자리에 늦은 가을이 허허롭게 누워 있다. 홍해리 시인은 추수가 끝난 논을 보면서 앙상한 몸에 젖줄이 마른 늙은 어머니를 연상하였다.


다들 돌아간 자리

어머니 홀로 누워 계시네

줄줄이 여덟 자식 키워 보내고

다 꺼내 먹은 김칫독처럼

다 퍼내 먹은 쌀뒤주처럼

한 해의 고단한 노동을 마친

허허한 어머니의 이 누워 계시네

알곡 하나하나 다 거두어 간

꾸불꾸불한 논길을 따라...

빈 몸 하나 허허로이 누워 계시네.(홍해리, 가을 들녘에 서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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