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맑음
그제아침 서울 오는 길. 짐 보따리에는 호박 스무 개가 올망졸망, 아이 머리통만한 것부터 돌쟁이 주먹만한 것까지. 사이좋은 형제간의 서울 나들이로 서로 수군거린다. 가져갈 것도 나눠줄 것도 별반없는 가난한 내 인생이지만 우이시장에 난장을 펴고 “골라요 골라!” 외칠까보다.
언제나 그렇듯 서울길은 멀고 지루하다. 태릉을 지나 동부순환도로를 들어서려다 너무 막혀 ‘동일로’로 방향을 틀자 찻길도 트이고 삼각산이 바라보이며 내 숨통도 트인다.
핸드폰을 산 지 3년이 넘어 배터리가 수명을 다한듯해 쌍문동 A/S센타에 들러 배터리를 갈고 데이터도 124기가 칩으로 바꿨다. 몇 년 만에 한 번 하는(3년에 한번이나 오는 일이지만) 이런 얍삽한 편리함 땜에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포기 못하는 것일까?
집은 어둑하고 아래층 살던 주민이 떠나려는 마음을 집이 먼저 알아선지 유난히 썰렁하다. 몇 년에 집사가 한번씩 바뀌지만 남는 사람이나 가는 사람이나 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화분의 식물들이나 뜰의 꽃들도 그새 낙엽이 지고 초라한 자태여서 넘어가는 해가 서럽단다. 짐을 풀고 뜨락 수세미 밑둥을 잘라 물을 받으려니 줄기는 이미 말랐지만 굵직한 열매들은 미처 영글지 못한 초록이다. 두 달 가까이 주인이 없었음이 곳곳에 보인다.
보스코가 번역하고 주석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
어제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용산구 ‘네이버문화재단’에서 개최하는 ‘열린 연단’이라는 문화강좌에서 보스코가 강연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 고백록』과 『신국론』을 개괄하는 강연으로 보스코는 자신이 번역한 책을 두 시간 넘게 풀어갔고 어느 교수의 질문에도 거침없는 답을 내놓았다. 코로나사태로 그 널따란 강당에 청중은 없고 자문단 교수들만 듣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녹화를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의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국내의 학계에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가 일주일에 한편 꼴로 실린단다.)
보스코의 강연에 대구가톨릭대 최원오 교수가 논평을 했다. 최교수가 내게 들려준 얘기로는 ‘대가를 모시고 하는 강연’에다 ‘SNS에 남겨져 많은 사람이 두고두고 볼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엄청 마음이 쓰이더란다. 그래서 예전에 『신국론 2900페이지』을 한번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한 번 정독을 했단다. 얼마나 길고 얼마나 어렵던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성선생님은 어떻게 그걸 다 번역하셨는지' 존경스럽단다. '너무 힘들었기에 세 번은 안 읽을 생각'이며, 대한민국에 자기처럼 이 책을 두 번 읽은 사람도 없을 거라지만, 학자로서의 성실함, 진지함, 겸허함이 차고 넘치는 최교수의 논평은 참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제 서울에 도착하면서 보스코가 피곤한 기색이어서 "당신을 서울까지 싣고 온 사람은 난데 실려온 당신이 왜 피곤하단 말이에요?"라고 구박하니까 "몰라? 당신은 시저를 모시고 다니는 거야!"라고 되레 큰소리친다. 시저(로마 영웅)가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맞아 뱃사람들이 죽게 돼 전전긍긍하자 "왜들 겁내나? 너흰 지금 시저를 싣고 가는 중이라구!" 큰소리친 일화.
나이 80에 두 시간 강연으로 흐트러짐 없이 좌중을 압도하는 학자적 분위기를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대한민국에서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는 '유일한 남자'이리라는 점에서도), 오늘도 강연장까지 따라가 방청하는 아내의 처지를 보더라도, 보스코가 '시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곰'은 되는 듯하다(강연은 그가 하고 강연료는 이 '왕서방'이 챙기니까).
오늘 낮 조광 교수 부부와 4.19탑 근처에서 점심을 하고 차를 마셨다. ‘평화의 모후’요 ‘조강지처’(아들 이름이 ‘평화’요 남편 이름이 ‘조광’)를 자처하는 평화엄마는 거의 10여년 만에 만났는데도 엊저녁에 헤어진 친구처럼 반갑고 재미있고 한결같다. 외손녀가 대학을 다니는데도 딸네집 A/S에 분주하단다. 우리 두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세상에, 딸도 못 낳는 여자가 난 제일 불쌍하더라!"는 구박을 그미한테서 받아온 터라 오늘은 늘그막에 나한테도 딸이 넷이나 생겼다며 나도 딸자랑을 싫컷 했다.
보스코랑 조교수는 4.19 공원에서 산보를 하겠다기에 한가한 두 남자(자기 공부외에는 만사를 아내에게 떠맡기고 산다는 게 공통점)는 공원에 남겨두고, 늘 일복에 깔려 '돌아가시기 직전'으로 살아가는 두 여자는 할일이 태산으로 기다리는 집으로들 돌아왔다. 서울집 냉장고 뒤 전기콘센트가 누전으로 불에 그을려 화재직전임을 오늘 아침 발견한 터라 전기기사 배사장님을 불렀고, 이웃의 사진작가 레아씨가 뜰과 방을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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