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4일 금요일, 비오다 말다

 

 

어제 한국염 목사가 “진주이주여성인권센터” 개소식을 앞두고 회원들 교육을 위해 내려왔다고 나더러 오늘 12시쯤 진주로 오라고 전화했다. 회원들에게 나눠주려고 상추, 쑥갓, 아욱 같은 쌈 채소와 부춧닢, 민드라미 잎을 뜯어서 사과상자 하나 가득 챙겼다. 먹는 사람들에게야 별것 아니지만 농사지은 사람들에게는 쌈 한 잎 한 잎도 꼭 내 새끼 같이 애틋하다.

 

텃밭에서 멀리서 들으니 보스코가 아침에 로마의 카르멜라와 “스카이프” 영상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올라와 “카르멜라 잘 있대요?”라고 물었더니 “파스콸레 신부님이 돌아가셨데.”라고 한다. 그것도 지난 3월에 말이다!

 

지난번 쟌카를로 신부님에게 부활절 인사 전화를 드렸을 적에 쟌카를로 신부님은 내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몰라도 돈파스콸레의 별세에 대해서 내게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아마 얘기해 주는 걸 잊었나보다.

 

오늘 낮에 보스코가 쟌카를로 신부님에게 확인전화를 드렸더니 지난 3월 2일에 78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작년 12월부터 간암의 상태가 악화되어 로마 비오11세 환우 살레시안들의 집에서 요양하고 계셨다고, 시신은 유언대로 고향의 집안 묘소에 묻혔다고 전해주시더란다.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에 전송나온 쟌카를로 신부님(왼쪽)과 파스콸레 신부님 pasquale-1.jpg

 

파스콸레 신부님의 집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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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은혼식을 축하해준 살레시오 신부님들과 함께 pasquale-5.jpg

 

이번 유엔사무총장에 재선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의 살레시오 신부님들 방문.

(왼편 끝이 파스콸레 신부님, 왼편에서 네번째는 주이탈리아 조영재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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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콸레 신부님(Don Pasquale Ransenigo)은 쟌카를로 신부님과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만났다 하면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하나가 없으면 못 사는 처지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동창으로 함께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고 함께 북이탈리아 관구에서 일하다 함께 로마로 내려와 30년을 한 공동체에서 살아온 처지였다. 파스콸레 신부님이 병들자 쟌카를로 신부님도 힘이 쑥 빠져서 그분의 침실로 죽을 쒀 나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맘 속으로는 서로 끔찍이 위하면서도 주로 파스콸레 신부님이 쟌카를로 신부님을 놀리는 편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손재주가 좋은 파스콸레 신부님은 수도원 지하실에 온갖 공구와 설비를 갖춰놓은 공작실에서 그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과 기계들을 수리해 주고 계셨다. 때로는 쟌카를로 신부님의 부탁을 장난삼아 외면할라치면 “술란! 네가 돈파스콸레한테 부탁 좀 해 주라. 네 말이면 다 들어주지 않니?” 라면서 나를 시켜 자기 부탁을 관철시키곤 했다.

 

파스콸레 신부님과는 1997~8년 우리가 로마에서 안식년(서강대)을 보내면서 산칼리스토 카타콤바에 살면서 사귀게 되었다. 그 카타콤바는 살레시안들이 관리하는 교황령 시설이어서 우리는 그 구내에 집을 구해서 만2년을 지냈다. “순란의 전성시대”에 해당하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편한 세월이었다. 그분은 그곳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정규교육을 포기한 청소년들의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교육부 위촉으로 살레시오수도회가 운영하는데 교육부와의 채널을 그분이 맡고 있었다.

 

워낙  언변이 뛰어난 분이었고 그때에도, 그 뒤 5년후 보스코가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로 가서도 보스코가 이탈리아어로 연설문을 발표하는 경우에는 연설문을 그 신부님이 손질해 주었다. 수사학적으로 다듬고 미려한 이탈리아어 단어와 문장으로 멋지게 윤문해 주시곤 하였다.

 

파스콸레 신부님은 아토피로 고생하는 처지여서 내가 간혹 수지침을 놓아드리면 침보다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술란, 제발 눈 좀 뜨고 해라! 너 지금 눈 감고 있니? 뜨고 있니?” 라면서 작고도 쪽 째진 내 눈을 두고 나를 놀렸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 다니는 동양 아이들을 놀릴 적에 하는 말이 “오끼 디리띠. 나소 삐아또. Occhi diritti, naso piatto ”인데 “쪽 째진 눈에 납작코”다. 그런데 시아도 요즘 유치원에서 그런 놀림을 당하는 기색이다. 동양애들의 대꾸는 "오끼 디 무까, 비소 빨리도 Occhi di mucca, viso palido"인데 "황소눈깔에 희멀건 얼굴"이다.)

 

그곳 살레시안들이 우리 부부에게 결혼 25주년 은경축 잔치를 차려줄 적에도 파스콸레 신부님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그 때의 기념사진을 CD로 구워 선물해 주시기도 했다. 그토록 여유있고 익살과 유머에 가득 차고 뭣이든 고쳐내는 손재주를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못 보게 되었다.

 

혼자 남은 쟌카를로 신부님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스럽다. 전에는 한 달이면 서너 차례 전화를 드리곤 했는데 지리산 생활이 뭐가 바쁜지 통화가 한 참이나 뜸했다는 게 파스콸레 신부님 부고를 이제야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 셈이다.

 

9시 넘어 집을 나와 보스코와 “오라버니”를 방곡 입구에 내려다 주고 나는 진주로 차를 몰았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지리산종교연대” 성직자들이 내일 6.25를 맞아 합동으로 2011년 지리산 생명평화를 기원하며 드리는 기도회"가 10시부터 있다. [이 홈피 “문정리 사진첩” "지리산 생명평화 기도회" 참조]

 

나는 진주에 도착하여 10시 30분에 가야병원에 가서 지난 번 변이세포가 보인다던 자궁경부 검사를 하고 신암동 어느 회원 집에 모여 이주여성 인권센터 개설을 위한 교육과 함께 마지막 점검을 하는 자리에 도착하였다.

 

한국염 목사는 우리가 이주여성을 돕는다는 시혜자로서 말고 그들의 고생스러운 삶을 함께한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할 때만 이국에 시집와서 온갖 수모와 역경을 당하는 그니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 기회를 제공해 줄 거라는 요지의 얘기를 하였다.

 

   진주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봉사할 회원들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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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고 그곳 회원들은 가까운 데서 식사를 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일행은 삼천포로 가서 장어구이를 대접받았다. 식사 후 어시장에 들러 국염씨는 멸치 두 포를 샀고 나는 꼬막과 깐 홍합, 한치를 샀다. 국을 끓이고 무쳐서 이웃들과 나눠먹을 생각에 생선이 상할까 봐 서둘러 집으로 달려왔다.

 

     "2011년 지리산 생명평화를 기원하며 드리는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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