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8일 금요일, 맑음

 

현지시간으로 어제 밤 12시에 인도 델리를 떠났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3시 30분경이었겠다. 탑승 전 한교수님이 사 준 맛있는 카푸치노 한 잔씩을 들이킨 우리 부부는 그 덕분인지 밤새 반 시간도 눈을 못 붙였다. 보스코는 넷북에 저장해 둔 "닥터 하우스"를 눈이 빠져라 감상하고 있었다.

 

에어 인디아가 홍콩에 도착한 것은 새벽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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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간 두 주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더듬으며 한 줄씩 남기고 싶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라면, 길 가다 옷깃 한 번 스치는데도 삼세(三世)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두 주간을 이국 땅에서 함께 보냈으니 우리 사이에 얼마나 질긴 인연과 업보가 있었겠는가!

 

안신부님: 단연 우리 까뽀(capo: '대장‘이라는 이탈리아어)로서 시작할 때부터 형광빛 연두색 스카프와 가방에 달 연두색 리본을 준비해 와 나눠주심으로써 당신이 전문 여행인임을 보여주셨다. 가장 무거운 가방을 가져오셨는데 요술궁전처럼 그 속에서는 갖가지 물건이 나오는데, 인천 비행장에서는 각자가 여행 중 읽어야 할 책 곧 영혼의 양식이 배부되었고(우리에게는 “리영희평전”과 “인문학으로 떠나는 인도여행”이 배당되었다) 우리가 방문할 처처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뽑아 복사한 안내문들이 한 묶음 배포되었다. 허경희씨가 지은 “인문학으로 떠나는 인도여행”(인문산책, 2010년)은 우리가 가는 곳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게 만들어준 양서였다.

가는 곳마다 신부님은 섬세한 배려와 이동 중인 버스에서 개최하는 유머대행진 내지 노래자랑을 앞장서서 챙기셨고, 가이드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배려를 해 주고자 사제다운 섬세함을 내비쳐 일행의 감동을 샀다. 성격이 워낙 급하신데 인도에 와서 “무작정 기다림”이라는 엄청난 덕성을 닦으셨으리라.

 

황신부님:  쉬는 시간마다 건강보행을 수행하시는 그분의 올바른 걸음처럼 하나도 흔들림 없이 시종일관 조용한 미소로 언니처럼 어머니처럼 가만히 기대고 싶고 가만히 손잡고 가고 싶었던 분.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마음을 쓰셨다.

성토마 성당에서 미사를 주례하시면서 하신 강론에서도 인도 문화와 현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차중에서는 그분의 유머가 일동에게 가장 커다란 폭소를 자아냈다. 삶 자체가 행복임을 일러준 그분의 미소는 우리 마음에 오랫동안 녹아 남을 게다.

 

은희 선생: “줄을 서시오!” 이 말을 듣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그니의 여유로운 몸매와 복스런 웃음이 생각날 게다. 흔들림 없이 투사의 길을 걸어온 여장부답게 기차간에서는 “강남사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적어도 김기영 부사장님은 마지막 날 그니와의 대화가 퍽 “유익하였다”고 그니에게 실토하는 것을 내가 목격하였다) 인도 민중의 “강요된 가난”에 분노하다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아이들을 끔찍하게 좋아하였다. 

“미성년자들”(보스코가 30세, 31세, 48세와 49세의 네 사람을 통칭하던 호칭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이 호칭에 속도 상했을 게다. 49세의 여자한테 “미성년자”가 뭐람!) 그룹에 강제로 편입되어서도 우리 단체의 모든 서비스에 앞장섰다. 그처럼 따뜻하고 뜨거운 열정을 나는 내 주변 단체의 친구들의 그것처럼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배낭객들의 거리”에서 용 한 마리를 팔뚝에 문신하여 우리나라로 끌고 오고 싶었는데 정작 나온 것은 지렁이 내지 설설이 같아서 일동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지렁이의 중국 이름이 “토룡(土龍)”이기는 하다).

 

수산나양: 출국을 기다리는 델리 공항에서 나는 그니의 머리를 따주었다. “아, 내 딸이라면!”하고 탐이 나던 아가씨! 3월 25일에 샤르트르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한다면서 명동성당으로 우리를 초대하기도 했다. 늘 행복하고 열린 마음, 그리고 따스한 열정이 있으니 시집을 갔어도 잘 살았겠지만 수녀가 되어서도 잘 살 사람임을 내가 100% 보장한다.

수녀가 되어 모든 게 매어 있는 몸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난 자유로운 해외여행 같은데 보조개가 패이는 맑은 웃음으로 "미성년자그룹"을 잘 다독여갔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차분하게 조분조분 하는 당당함도 있었고....

 

 

김사장님: 한 마디로 “신사”였다. 누구를 향해서도 열린 마음과 무엇이라도 먼저 내어놓는 자세가 곧잘 수줍어 얼굴이 붉어지는 천진함과 함께 우리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어먹었으니 지리산 휴천재를 찾으면 융숭히 대접해야겠다. 우리 그룹의 어르신들만 아니라 미성년자 그룹에게서도 “참 좋은 분”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남을 행해 팔과 마음을 열고 있는 만큼 건전한 보수요 “건실한 삼성맨”이라고 평가받는 얘기를 들었다. 신실한 크리스쳔임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오가는 버스에서는 유머 나누기에 가장 열성적이었는데 본인 말로는 워낙 수줍음을 타서 남과의 사귐을 위해서 일부러 유머를 수집하여 핸드폰에 담아 두고 남들에게 웃음을 선서한단다. 투철한 직업정신이기도 하다. 굉장한 속도로 책을 읽는 분으로 안신부님이 추천하신 여러 권의 책을 여행 중에 다 독파해내는 열성을 보였다. 우리 사돈과도 아는 사이였다.

 

미령님: “이곳 음식이 나는 참 맛있어요.” 보통 사람이 먹으면 비위가 상할, 싹 틔운 녹두까지도 맛있게 건강하게 먹을 만큼 인도여행에 잘 적응하였다. 함께 여행을 해 보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무난하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분 같았다. 우리 “아줌마 그룹”의 대화에 조용하게 참석하고 유머를 나누는 분으로 그분의 가계운영 방식이 독특하다고 우리가 농담을 걸기도 했다.

 

윤선생님: 평화통일운동가답게 기회 닿을 적마다 시간 있을 적마다 평화와 통일과 민주와 인권을 날숨처럼 입에 달고 만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열정을 담고  계셨다. .

금시계인 팔목시계가 바테리 고장인지 하루에 두 번만 맞는다고 한탄하셨다.  며느리가 사주었다는 카메라가 이튿날부터 망가져 사진기록이 없어진 윤선생님을 위해서 카메라를 든 이들은 그분이 나오는 사진을 우정의 표시로 꼭 보내드려야 할 게다.

그뿐이 아니다. 시작부터 여행 가방의 망가진 바퀴와 손잡이(나중에 콜카타 시장에서 아마 바가지를 쓰고 산 2500루피짜리 짝퉁 삼손나이트마저 끌대가 빠져버렸다) 땜에 삼손나이트에 대한 여한을 풀어야겠다고 다짐하던 분이다. 그리고 부인 없이 혼자온 분이라 룸메이트로 인해서 상당한  마음 고생을 한 분인데 여전히 빙긋 미소를 머금고 일행을 격려하셨다

 

서울시간 낮 11시 57분을 가리키는데 인도항공 비행기가 드디어 인천공항에 착륙하였다. 짐을 찾고 나오자 "미래사회와종교성연구원"에서 사람이 나와 환영 꽃다발을 대표인 안신부님께 안겨드리고 우리 각자에게도 장미 한 송이씩 나눠주었다. 뜻밖의 대접이었다.

 

이번 순례를 주관한 미래사회연구원으로부터 곷다발을 받은 안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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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데 며칠 지나 정신이 들면 서로를 많이들 생각할 게다. 수유역까지 오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을 나오자 내 땅은 역시 깔끔하고 그래도 조용한 편이라는 안도감이 나를 맞아주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언제나 자그마한 내 조국 내 땅이다. 이 신념은 도합 13년 이국생활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고 이번 두 주간의 인도여행에서 새삼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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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세 개를 풀어 세탁기를 무려 세 번이나 돌리고, 3시에 먹은 늦은 점심으로는 라면, 저녁에는 콩나물 김칫국 한 가지로도 행복한 식탁이었다. 내 집 내 침대에 긴 여행의 짐을 내려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