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6일 화요일, 밤새 비 온 뒤 맑음
금요일 밤. 겨우내 쓰던 심야보일러를 끄고 기름보일러를 켜니 에러 번호 03이 뜬다. ‘점화가 안된다’는 표시란다. 금요일에 난방이나 다른 고장이 발생하면 월요일까지 꼬박 A/S를 기다려야 한다. 날씨가 풀렸어도 온기가 며칠 사라진 집안은 바깥보다 더 춥다.코가 맹맹하다.
어제 아침에 신고를 했더니 우리집 단골 A/S 기사가 ‘한 시간 안에 갈 테니까’ 좀 기다리란다. 9시에 보스코랑 남호리에 신선초를 심으러 가기로 했는데 일을 미루고 오전내 기다렸는데 기사는 나타나질 않았다. 12시 넘어서야 내 독촉전화를 받은 기사는 먼저 들른 집에서 일이 길어졌다며 끝나는 대로 곧 가겠단다. ‘제 때 오긴 틀렸구나!’ 우리집 보일러실은 그가 이미 알고, 2층 뒷문을 열어 놓았으니 본인더러 서재에 들어가 실내기를 켜고 고치라고 ‘나는 내 일 보러 집을 비운다’고 통보했다.
남호리 땅은 본주인이 밭농사를 오랫동안 짓다가 20여년 버려둔 곳이라, 굴착기로 잡목을 뽑아내고 바위를 걷어내고 나니 먼저 밭이었던 흙이 드러났다.흙이 떡가루 처럼 곱다. 새로 손질한 흙이라 보스코는 비탈을 내려가며 괭이로 슬슬 골을 내고 나는 그 골에 신선초 뿌리를 벌려 놓고 호미로 꼭꼭 묻어주었다. 저것들이 자라 올라 미루네 효소공장으로 직행하면 ‘팔보효소’가 되고, 성삼의 딸들에게 가면 ‘신선초 장아찌’가 된다. 효소로든 장아찌로든 사람들 건강에 일조하면 법화산 발치 고성골에서 자란 신선초(神仙草)답게 중생에게 이바지하려니....밭 가로는 10센티 짜리 비자나무를 50주나 심었다. 저게 잘 크면 멋진 비자나무 울타리가 되어 줄꺼다.
서너 시간 흙일을 하고나니 등줄기로 땀이 골을 이룬다. 네 푸대의 신선초 뿌리를 심고나서 골짜기로 올라오는 강바람을 쐬며 차와 과자로 간식을 하는 기쁨으로 노동의 보상은 충분하다. 특히 보스코처럼 머리만 쓰는 사람에게 육체노동은 정신에도 보약이다.
경동보일러 아저씨 둘은 저녁 7시가 넘어서 찾아왔다. 시골 할매들이야 특별히 갈 데가 없으니 '밤잠 자기 전 오늘 중으로 가요!' 한다지만... 그 시간에라도 찾아온 사람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이 나는 일이 끝났는데 그들은 아직도 근무 중이기 때문. “보일러가 번개 치던 날 낙뢰로 센서가 해까닥해서 되다 말다 한다”는 진단을 내리더니 “오늘은 우선 냉기만 달래고 주무시쇼. 내일 부속 갖고 다시 와서 고쳐 주꾸마.” 과연 그 내일이 어느 내일일지... 오늘 화요일에도 그들은 안 왔다. 워낙 분주하다 보니 어느 영화제목대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간밤에 비가 내려 남호리에 심긴 호두나무와 신선초에 마음이 놓인다. 봄이 되면 난 엄나무순의 별미에 필이 꽂히고, 보스코는 이탈리아에서 먹던 체리에 필이 꽂힌다. 남호리 심을 나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 오후 함양 ‘가재골’ 체리농원에 가서 체리나무를 구했다. 스.선생네 것도 함께 구입했는데 우리 몫으로는 엄나무를 열 그루 사고, 보스코가 열 그루 사서 딸들한테 분양하자는 체리는 다섯 그루만 샀다. 그래도 한 그루씩은 돌아가겠다(엄나무는 열 그루 값이 5만원인데 체리는 한 그루에 3만원이라니).
나는 과연 내일 심을 이 나무들이 살아날까 걱정인데, 보스코는 내 ‘꽃욕심’으로 보아 남호리땅 전부를 온갖 과일나무로 가득 채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래서 부부가 한 침상에 누워서도 동상이몽.
내가 묘목을 사러 간 사이 보스코는 배밭의 전지작업에 나섰다. 지난 한 해 나무마다 도장지들이 가득가득 하늘로 자라 올랐는데 아까워서 못 자르고, 어찌 자를지 몰라 못 자르고 결국 일손을 놓고 올라왔단다. 저녁에 남원 배과수원 주인장 요한씨에게 전화를 해서 하늘로 직립하는 새 가지는 모조리 자르고 하나쯤만 ‘신초’로 남겨야 한다는 지침을 받고서 내일 그리하기로 정했다.
햇살이 좋아 보스코가 2층 테라스에 빨래를 널고 헝겁 접이의자도 일광욕하라고 내놓았더니 떡하니만 길냥이가 올라와 누워 있더란다. 우리 부부는 동물과 별로 안 친해 고양이가 눈치껏 사라진 뒤에야 털을 털어내고 찍찍이로 찍어내고도 꺼림칙한데, 건넛동네 반곡 이교수네는 건축과 교수답게 집 뒤꼍에 3층 다세대 아파트를 지어 길냥이 노숙자 여섯의 숙소를 만들고 상당한 경비로 식사도 제공한다는데....
수술 후 상처가 아문 자리에 회복이 빠르라고 오늘 밤에는 손바닥에 쑥뜸 석장을 세번 떴다. 워낙 담배 냄새를 싫어해 태라스에 나가서 쑥뜸을 하는데, 아직 봄바람은 차도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에 미루나무 싹들은 자글자글 얼굴을 비비고, 벚꽃은 멍글대로 멍글고, 버들강아지는 보드라운 털로 봄바람에 간지럼을 먹이고 있다. 가슴 두근거리는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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