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일 설날. 흐림


하늘이 흐리다가 해가 날 듯하다가 돌연 눈발이 날린다. “여보, 한겨울에 웬 날파리들이 저리 날까?” 안경을 벗고 창밖을 내다보던 보스코의 물음. 날파리 아닌 눈송이였는데. 아침나절에는 지리산을 넘은 눈이 산을 넘느라 기운이 빠졌는지 몇 마리 날파리처럼 가문비나무 위로, 마당 화단의 반송 위로 힘없는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점심 후 산청 동의보감촌에서는 제법 함박눈으로 내렸다. 올 겨울 지리산에서 두번째 눈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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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해 첫날! 조상님들께 인사차 성무일도 아침기도와 미사를 올려 차례를 대신했다. ‘가림정임신부님 댁에서 드린 미사 지향으로 보스코의 조상님들과 우리 친정집 조상님들을 위한 예물도 올렸다. 말하자면 사돈끼리 주님의 식탁에 함께 앉으셔서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시라는 부탁이었다. 천당 후미진 길에서 어깨 좀 부딪치더라도 얼굴 붉히는 일 없게 교통정리좀 해드리시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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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자라난 성장과정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둘의 50년 결혼생활만 보더라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말씀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5,3-4)는 기도밖에 없다. 보스코가 자기 묘석에 새겨주기 바라는 구절처럼 주님께서 너에게 잘해주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시편 114,7) 한 마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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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라 미사에 가면서 모처럼 호사를 부리고 싶어 먼지가 쌓이도록 걸어두었던 생활한복을 꺼내봤다, 좀 쑥스러워 원피스를 입어봤다, 결국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내복에다 기모바지에다 털세타에다 오리털 조끼를 교복마냥 입어온 터다. 창밖에는 협박이라도 하듯 세찬 눈보라가 기욱이네밭 대나무 허리를 휘어잡고 우리 텃밭에서는 날개 떨어진 팔랑개비를 무섭게 돌려대고 있었다. 보스코도 3층 다락에 둔 한복을 입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겨울 한복은 서울집에 있다) 그냥 두면 여름 한복을 입고 나설 참이어서 한참 말려야 했다.


스승예수제자수녀회 허파치스 수녀님이 빵고신부에게 그려주신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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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살레시오 중학교 기숙생활 시절부터 즐거움에서 주를 섬겨라!”는 모토를 들으면서 자라선지 축제를 축제답게 지내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다. 어제는 돈보스코 성인의 축일이었기에 많은 지인들이 그에게 축하전화와 문자를 보내왔다. 저 성인은 그냥 청소년들의 수호자에서 그치지 않고 내 남편의 4형제 고아를 중고등학교 6년씩 공짜로' 키우고 먹이고 공부 시킨 아주아주 구체적인 성인이다.


또 살레시오에서 보스코가 입은 수많은 은덕 중 아내인 내가 제일 고마워하는 것은 그의 온화한 성품이다. 울엄마가 정신줄 놓기 전 마지막 몇 년,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에게서는 못 보던 인간적 따스함 때문인지 때때로 큰사위에게 성서방 사랑해!”라는 사랑의 고백을 하셨다. 아빠를 위시해서 친정집 남자 누구도 조정옥 여사에게서 못 들어본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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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몸이 좀 불편해진 봉재 언니를 대하는 보스코의 모습이 너무 따뜻해, 손잡고 걷는 두 팔순 갑장을 뒤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와 미루와 봉재언니의 여동생은 흐뭇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이가 들면 우리의 몸도 정신도 하나씩 허물어진다. 멋진 말재주나 근사한 외모는 낡은 옷처럼 스러지지만 온화한 인간미는 거친 원석 속에서도 언뜻언뜻 빛을 내비친다. 이 점에서도 교육자 돈보스코는 내게도 '아주아주 구체적인' 성인이다.


오늘은 빵고신부의 생일. 내가 끓여준 미역국 대신 수도원의 떡국을 먹었겠지만 마흔네살 나이에도 내게는 귀여운 아기 그대로. 생일축하 전화에 자기를 낳아주시고 잘 키위 주셔서 고맙다, 무엇보다도 두 분이 사이좋게 잘 놀아서자기도 형도 부모님 걱정 않고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단다. 두 노인네가 망가져 아들들 본분에 지장 주지 말아달라는 당부처럼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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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미사를 마치면서 임신부님이 내리신 '새해 축복'(민수 6,24-26)은 우리 피붙이들에게, 우리 네 딸들과 각각의 피붙이들에게, ‘만남이라는 은총으로우리를 사랑해주는 모든 지인들에게,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가름할 선거를 앞둔 한겨레에게 내가 한 몫으로 받아왔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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