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1일 일요일, 흐림


아침기도에 땅을 가꾸며 지배하라는 성서 구절을 생각없이 땅을 가꾸고 재배하라고 읽으니까 보스코가 웃으면서 당신의 머릿속엔 꽃과 나무와 잡초(뽑아낼)로 가득 차 있어재배하라고 읽는다나? 그런데 농사를 지으며 자연에 살다 보면 재배를 해야 걔들과 친하게 지내지 걔들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새로 사온 체리 나무에 알맞는 자리를 찾아주려 보스코가 오랜 배나무 두 그루를 베었다. 배나무가 조생종 원앙이어서 화수분(花受粉)을 돕느라 심은 나무들이어서 좀처럼 열매를 매다는 일이 없는 것들이다.


어제가 춘분. 해가 왕산에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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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는 모처럼 지리산 휴천재 텃밭으로 시집을 온 것이지만 시어머니 극성에 며칠 사이에 네 번이나 옮겨 심기며 방을 옮겼으니 더는 이사를 안 시켜야겠다. 퇴비거름 봉지에 흙과 거름을 채워 우엉 싹들을 그득 옮겨 심고 나서 찬바람 일고 별을 보고야 집으로 올라왔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해거름에 산보 나온 드물댁이 동네아짐들 보다 일을 더 많이 하요? 그만 집에 올라가요!”라고 고함을 질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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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창을 열고 보니 빗줄기가 테라스 측우기(딸기그릇)를 채우고 있다. 저녁 무렵 비가 온다는 예보여서 남호리에 나무 심기를 하루 미루었는데(‘하느님, 반칙입니다, 예보대로 안 하시면!’) 점심 후에는 이슬비를 우산으로 받으며 남호리 고성골로 보스코랑 산보를 나섰다. 호두나무는 안녕한지, 며칠 전 옮겨 심은 신선초는 어떤지, 실가락 같은 비자나무는 흔적이라도 남겼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다. 내일 딴 나무를 심으러 와도 산신령님이 입산을 허락 해주시려는지도 보러 가는 길.


휴천재에서 문상마을 오르는 언덕길에 매화는 거의 졌고 벚꽃, 복사꽃, 개나리가 조심스레 봉오리들을 열고 이슬비로 얼굴을 씻으며 봄화장을 하는 중. 몇 대에 걸쳐 새끼를 낳아 키우던 딱따구리의 둥지도, 서까래부터 내려앉아 무너지고만 낡은 집과 쌍을 이룬다자식들 대처로 내보내고 영감마저 죽고 혼자 살던 할매마저 세상을 버리면 함께 버려져 아무도 찾지 않는 집... 그래도 철부지 아이들처럼, 꽃은 피어올라 봄과 어울리고, 가까이서 멀리서 아름다운 산... 땅 위로 내려와 뿌리를 내리는 봄... 멀리 지리산 능선이 달려와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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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절로 녹는다 툭툭 물꼬 터진다 어디 막힌 곳 없다 콸콸콸, 봇물 흐른다

바람결 곱다 햇살 반짝인다 뾰족뾰족, 달래싹 돋는 땅, 때 되어 산언덕 위 화들짝 진달래꽃 피어오른다

보아라 이다 의 섭리다 (이은봉, “에 대하여”)


진이네가 어려울 적에 어떤 스님에게 팔았던 산꼭대기 염소막 쪽 비탈을 걸어 내려갔다. 사람이나 짐승이 오가지 않아 버려진 길 위로는 지난 가을에 떨어진 갈나무 잎이 썩지도 못해 수북하고, 진이네가 타지에 나갈 적마다 개, 염소, (유황)오리에게 먹이와 물을 주러 둘이 올라왔던 가축우리들은 무너진 자취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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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골 여섯 마지기로 커다랗게 개척한 블루베리 밭. 군에서 귀농한 농부로서는 제일 성공한 귀감으로 꼽히는 진이네 밭이 펼쳐진다. 우리가 ‘꿀벌부부라고 부르는 양주가 엄청난 고생과 노동을 했고 아직도 할 일이 겁 없이 많아 둘러보는 나까지도 걱정스럽다


그 아래로는 게으른 농부가 밭고랑만 센다는 우리 밭에 호적 없는 호두나무들 곁에, 휴천재에서 이사 온 신선초가 파란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못나도 내새끼라지만, 고것들이 수년간 튼실하게 자란 진이네 한 길짜리 블루베리들보다 더 이쁘다.


오늘은 아침부터 고성골로 가서 엄나무 열 그루(분명 10개 샀는데 심고 나서 보니 하나가 사라졌다. 범인은 딱 하나 지피지만 이름은 발설할 수 없다). 체리나무 여덟 그루, 밤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 죽을 힘을 다해! 보스코는 호도나무와 오늘 심은 나무에 (예초기 돌릴 적에 잘려나갈 위험을 피하도록) 고춧대를 박아주었다. '살려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회초리만큼 가는 나무들이 외칠 존재론적 S.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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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9시부터 오후 230분까지 밭일을 했고, 허기진 채로 마천 짜장면집으로 갔다. 마을길에서 만난 드물댁도 싣고 갔다. 탕수육, 짜장1, 볶음밥1, 짬뽕1. 평소에 메뉴를 통일하시오!’ 하던 주인도 손님이 없는 시간이어선지 주문대로 음식을 내주었다.


저녁 7. 본당 주임신부님이 오셔서 판공성사와 미사가 있었다사제가 없어 공소예절을 지내거나, 비대면 영상으로 미사를 '관람'하는 것과 달리 작은 숫자라도 함께 모여 드리는 미사가 좋다. 특히 영성체가 있어서...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밥은 영상으로 배부른 게 아니다. 


(사순절도 막바지 사순제5주일: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mid=sundaygospel&document_srl=7178)

수녀님은 본당에서 떡상자를 가져와 교우들에게 나눠주셨다. 장례미사를 치른 교우가 답례로 본당에 내놓은 떡이란다. 우리는 그걸로 저녁 요기를 했고, 진통제도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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