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11일 목요일, 맑음


대구 수성구에 있는 범어도서관에서 하는 수성인문학 강좌 '중세 근대 시대 고전' 강의에 보스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사회적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러 갔다. 서울도 멀지만 대구도 멀다. 실제 거리는 120Km라는데 두 시간이 넘어 걸린다. 마음의 거린가


대구에 가면 내가 운전자라기 보다 여자 운전자라는 게 특히 느껴진다. 여자여선지 끼어들려고 해도 좀처럼 양보받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있겠지만 그저 내 느낌인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2시 강의인데 집에서 11시에 나갔다. 가는 길에 논공휴게소에서 간단한 점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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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거리두기로 인원이 제한되어 넓은 강당에 40명 정도가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간 길에 필립수녀님과 보스코의 서강대 제자 경선씨도 만나볼 겸 도서관으로 오시라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벌써 휴천재에서 보았을 사람들로 거기서라도 만나니 반가웠다. 강의가 끝나고 가까운 빵집에서 아쉬운 대로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와 진보적 인사가 대구에서 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성직자들 입에서도 '문죄인'이라는 말마디가 예사로 나오고 모든 TV채널은 극우매체로 맞추어져 있고 가짜뉴스가 정식뉴스로 보도되고 퍼날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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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은 적막강산 본당에 적응이 안돼 힘들지만 위낙 자신의 자리를 알고 바로 사시는 분이라 별 걱정은 않는다. 경선씨는 15년간 세 남자아이를 데리고 농사꾼으로 살았는데, 남편의 직장 때문에 대구라는 도시로 나오자 가족 모두가 적응에 힘들더란다. 큰아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려 풀무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둘째도 행님따라곧 그 학교에 들어가 농부의 길을 가겠단다. 초딩인 세째만 놀이터에 죽치고 앉아 학원 시간 끝나는 아이들과 그때그때 상대를 바꿔가며 놀며 이 아쉽고 힘든 도시생활에서 나름 대로 놀이를 찾아 적응 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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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루뱅에서 5년여를 유학한 경험으로, 이 신식 엄마에게는 정말 아이들이야 놀이가 공부인데... 그 집 모자간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올바른 교육을 하고 받고 있어 아주 행복하고 바람직해 보인다. 모든 걸 포기하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뺑뺑이돌림을 받으며 그걸 공부라고 하는데, 얼마나 훌륭해지냐는 고사하고 불행해지려 태어난 군상으로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머리로만 철학하는 게 아니라 삶 전체로 하는 한 여인을 만나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성주에 들러 정한길 가톨릭농민회 회장 부부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며 그간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워낙 뜻으로 사는 분이라 아이들도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집안이다. 예컨대, 올봄에 대학을 졸업한 막내딸이 한의사가 되겠다고 한의학대학에 다시 입학했단다. 인생 100년에 보람 있는 삶이 된다면 기꺼이 6년쯤이야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백번 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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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운전을 하려면 산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요즘 소나타가 너무 힘이 빠져 지난번처럼 도중에 서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인월 동아공업사에 갔다. 새로 온 총각이 내가 설명하는 증세를 듣고선 "그간 16년이 넘었고 30만킬로를 탔으니 당연하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하기에, "사람이나 차나 늙었다고 구박하면 섭한 거에요. 혹시 동맥경화증이라도 걸렸나 보라구요." 했더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서는 "늙어서 이만하면 됐다구요. 살살 달래서 타세요."란다. 나나 차나 신세가 비슷하니 괜히 애착이 더 가고 불쌍해서 쉬이 차를 바꿀 수가 없겠다.


보스코가 임플란트 준비차 낀 임시 틀니를 어제 잃어버렸다. 어제 입고 간 모든 옷과 자동차 바닥을 살펴보아도 없어 나에게 어지간한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인월에서 자동차 점검을 받고 돌아와서 보니까 보스코가 어제 들러 점심을 먹은 논공휴게소에 전활 해서 혹시 남자화장실 세면대에서 틀니를 발견하거든 알려 달라고 당부했단다. 과연 오후에 그걸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고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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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신나간 할배가 틀니 잃고 가서 할매한테 얼마나 혼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걱정되어 청소 아짐이 챙겨둔 듯하다. 늙는다는 건 차나 사람이나 가엾긴 마찬가지다. 논공휴게소 근무자들 참 친절하고 자상도 하다.


산넘어 남호리에 오래전에 사둔 밭을 포클레인으로 다듬었다. 칡넝쿨, 바위, 엄청난 잡초들이 포클레인 이빨에 뽑히더니 한데로 치워진다. 주변에는 첫봄을 알리는 생강꽃이 만발했다. 한아름 꺾어와 항아리와 꽃병에 꽃으니 생강꽃 향기에 집도 취하고 우리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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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엊그제 인규씨가 고랑치고 멀칭한 텃밭에 감자를 심었다. 왼손을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의사 말 땜에 오른손 하나로 감자를 심으려니 시간이 두배로 걸린다. 오른손으로 호미를 들어 멀칭 위에 구멍을 내고, 오른손으로 감자씨를 그 구멍에 꾸욱 눌러 심고, 다시 오른손으로 흙을 한 줌 긁어 덮어주는... 감자눈을 함께 따서 심고 양파밭 마늘밭 잡초를 뽑으면서 드물댁은 "요놈으것 땜시 농사 몬지껐다"지만 잡초가 뿌리를 내렸던 땅은 정말 비옥해져 있다. 지렁이가 나오면 얼른 흙 속에 도로 묻어 주는데 지렁이는 흙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농사의 동업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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