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4일 목요일, 흐림


추석에는 시집식구들이 지리산으로 와서 함께 지내고, 설엔 서울 친정에서 오라비들과 함께 지냈었다. 그러나 작년 추석 코로나로 인해 만나는 일이 취소됐고, 당연히 올 설도 서울에서 친정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포기해야 했다. 물론 엄마가 나와 계셨으면 어떻게라도 만났겠지만 엄마라는 구심점이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버린 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사방에 봄 오는 소리가 우이천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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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정월 엄마의 단식감행으로 식구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지난주에는 엄마가 다시 눈도 안 뜨시고 식사도 안 하시고 산소포화도는 40이하로 떨어진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온 가족이 몰려가지 않고 호천이랑 나만 병원과 연락을 하며 조용히 고비를 넘겼다


때마침 올케의 심장수술 간병을 위해 코로나 검진을 받아둔 증명서가 있어 호천이가 병실까지 들어가 한바탕 위문공연을 하고 나자 힘들어 하시던 엄마가 회복세로 돌아서더니 드디어 다시 식사를 하신다는 연락이 병원에서 왔다. 일주일에 한번씩 엄마를 보러 가던 자식들의 발걸음이 떨어지자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위기를 불러오곤 한다.


호천이에게 이젠 울 엄마도 100살이니 가신다면 그만 붙들어라! 가려던 발검음도 무겁고 남아서 버티는 인생도 버거우시다.”라고 일러주었다. ‘엄마랑 단 며칠이라도 함께 지내지 못하면 평생 한이 되겠어.'라던 호천이가 "누나 덕으로 내 원풀이도 했고, 병약한 엄마를 마냥 잡아 두는 것이 꼭 잘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나도 마음을 접을 게."라며 순순히 고개를 숙인다


우리집 화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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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데레사 언니의 모친상 부고를 받고는 많이 부러웠다. 그 어머님은 102세이신데 물과 곡기를 스스로 끊고서 링거로 연명하시다가 18일만에 소천하셨단다. 더구나 일주일 전에는 당신 발로 걸어서 성당을 찾아가 병자성사를 받으셨고, 돌아가신 날도 며느리 손에 의지해 화장실을 다녀오신 후 편안히 누워 운명하셨단다. “언니, 어머님께 그 복 좀 우리 엄마에게도 나눠주십사 빌어줘요.” 부탁했다. 엄마가 보고 싶고 걱정스럽고 겨우 전화로만 주변 상황을 전해 듣는 코로나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빈다.


서재 창밖의 산수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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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텃밭에서 걸핏하면 20Kg짜리 퇴비부대를 들어옮기다 보니 어깨 근육은 늘어나고, 오른손잡이인 내 허리뼈는 왼쪽으로 버티느라 많이도 어그러졌다. 시골에서는 소염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붙이는 게 전부인데 눈앞에 정형외과가 보이니 일 없이 물리치료를 받게 됐다


수술한 손 붕대 드레씽을 하러 간 길에 의사선생의 진단을 받고서 '도수치료'(받고 보니 예전에 모레내 이권사님에게 자주 받던 '카이로프락틱'이었다)를 받았더니만 몸을 추스리기 힘들만큼 온 몸이 쑤신다. 의사가 아는 순간 병이라니까 더는 딴병도 의사한테 들키지 말고 빨리 지리산으로 내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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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사는 친구들에게 봄 선물로 나눠주려고 산 칼란디바를 분갈이 해 주려고 뒷산으로 낙엽 썩은 흙을 뜨러 갔다. 전에는 낙엽만 젖히면 지렁이가 꾸물거리는 검은 흙이 탐스러웠는데 이상하게 퍼석한 모래에 썩지 못한 낙엽만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한 삼태기 퍼다가 상토1, 퇴비1, 산흙1을 고루 섞어 분갈이를 해 주었다.


이때면 봄부터 가을까지 해마다 서울집 테라스 난간에 놓을 제라늄 준비로 부산했던 날들이 생각난다. 이웃집 아줌마들이 담너머로 한마디씩 거들고, 정선생댁, 정민네, 채선생댁, 병협이네는 서로 꽃모종을 나누던 그리운 날들... 20여년전까지의 우이동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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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들이 멀리 아파트촌으로 이사가버리고 오래 정들여 살던 국민주택들은 헐리고 연립주택들이 들어섰다. 우리집 올라오는 골목은 우리집 한 채를 빼곤 다 연립으로 바뀌었다. 성당 가는 길 언덕 골목도 '가로주택' 아파트를 짓는다며 꼬마 집들이 모조리 허물어졌다. 


영심씨네 집터임장관댁과 카타리나형님네 집터는 지난겨울에 허물어놓고서 아직 그대로다. 개미굴이라 불리는 미로 같은 동네 길을 돌며 찻길이 없어 애태우기도 하지만 저 따개비집들이 모조리 다세대주택으로 변해 가고 20여년 지나면 다시 헐고 아파트촌으로 바꿔 짓겠지. 18평, 20평 대지라도 내 땅을 밟고 내 집을 지닌 사람들마저 가로주택을 한답시고 들떠 있다. 우리가 보아온 대로라면 '재개발' 건축사업을 믿었다 까딱하면 집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니 정신줄을 꼭 잡아야 할텐데...


동네책방('쓸모의 발견'인데 보스코가 '코딱지책방'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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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렬이 조중동의 격려와 선동에 흥분해서 검찰총장직을 내던졌나 보다. 우리 친정은 하나같이 보수지만 시집에서만 보스코('해방신학'과 '페다고지' 발간으로)와 찬성이서방님('민청학련'으로)이 40여년전 겪은 고초만 보더라도, 정치검찰들의 행악 때문에 대한민국 검찰은 무슨 범죄조직처럼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어서 문정권이 서둘러 검찰개혁을 마무리해줘야 하리라. 


해방후 80여년 세월 그렇게 검찰을 '개검'으로 부려먹던 지금의 야당을 비롯 이 나라 친일 보수 기득권 세력이 대권을 탈환하겠다는 욕심에 앞으로 1년간 그자의 바짓단을 붙들고 석렬이형, 살려줘요!’를 일제히 울부짖을 세월이 어지간히 소란할 듯하다그의 정치입문을 축하해야 할지 모르지만, 우리 순둥이 말마따나 '올바른 생각을 지닌 국민 전부에게 분노조절능력상실 증세를 퍼뜨려온' 터라 적어도 "진즉 떠났어야지." 하는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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