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일 화요일, 새벽녘엔 눈. 낮엔 맑음


오늘쯤에는 휴천재로 내려가려 했는데 의사선생님이 내가 운전한다는 소리에 극구 말려서 서울집에 머물게 됐다. 어제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점점 물방울을 키우고, 테라스에 놓아둔 플라스틱 간이측우기(키위 상자 뚜껑)를 채우고 넘쳐넘쳐 흘렀다. ‘아까워라!’ 물에 대한 갈급증은 하느님이 저렇게 하늘 가득히 물을 쏟아 부어주셔도 채워지지를 않는다. 그릇을 채우고 넘쳐난 물은 다시 주어 담거나 마셔버릴 수도 없고... ‘ 아깝다.아까워!’ 아무튼 하느님이 봄농사를 시작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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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숫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내 심정을 아는 사람은 딱 하나 저 남자뿐.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거쳐 왔으니, 흔히 말하는 '조강지처(糟糠之妻)!' '먹을 거라곤 술찌게미()와 쌀겨() 밖에 없는 살림살이', 몹시 가난하고 천할 때에 고생을 함께 겪어온 아내니까.... 그렇게 격심한 살림 전투에서 살아남은 부부가 이제 동지애로 묶여 남은 날들의 파고를 헤쳐나가는 중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고, 남은 날이 많지 않아 (먼 길을 돌지 않아도 그분 나라에 도착하여) 반가운 주님 뵈올 테니 더 좋고, 보스코와 그곳에서 영원히 살 터이니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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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후 친구 한목사가 병문안을 왔다. 반백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지켜온 우정이다. 봄비가 고목에도 새싹을 틔워 내듯, 그미 옆에 있으면 한없이 마음이 편해 나도 소녀의 날개를 단다. 각자 지닌 아픔을 얘기하다 보면 왠지 등짐이 가벼워지고, 끝도 안 보이던 어려움도 해결의 실마리가 얼비친다. 누구에게도 쉬이 할 수 없는 얘기도 편히 풀어내고, 말하고 나서도 떨떠름한 후회가 없는 사이가 정말 친구다. '정말하는' 친구다.


아직도 비는 주룩주록 내리는데 그미의 여린 어깨 위에 짊어진 배낭 같은 걱정이 이제는 제발 가벼워지길. 아니 훨훨 벗어버리고 휘휘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가 떠나간 골목 끝에 서서 이렇게 밀려오는 아픔은 또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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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에 말라버린 줄 알았던 줄기 밑에서 마당 여기저기서 새싹들이 고개를 든다. 태백언니가 준 꽃다발을 물에 꽂았는데 뿌리가 나오기에 땅에 옮겨 심었더니 (불로초 꿩의비름’) 쑥쑥 커서 꽃대를 올리고 희부연 엷은 보라색 꽃을 피웠었지... 크리스마스로즈도 곁에서 게으른 꽃송이를 틔워 올린다. 봄과 봄비와 어린생명은 모두 한 무리다.


땅을 굽어 보시고 단비를 내리시어

골고루 가멸지게 만드셨나이다.

하늘스런 시내에 물을 그득 채우시어

곡식을 장만하기 이렇듯 하셨으니

이랑에는 물 대시고 흙덩이는 고르시고

소나기로 푸시고 새싹에는 강복하셨나이다.(시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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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하늘의 나라님께서 밤새 온 세상에 흰 눈을 가득 뿌려 놓으셨다. 북한산 줄기가 눈에 덮여 '나 여기 있어.' 라는 듯이 거만하게 누워 있는데, 피어오르는 골안개가 산허리를 둘러준다.


수술한지 닷새가 지난 터라 오늘도 병원에 가서 소독을 하고 붕대를 다시 감았다. 아래층 집사 레아가 암벽등반을 하다보니, 왼손으론 자일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 무겁고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보니, 오른쪽 엄지가 나와 비슷한 방아쇠증후군같다기에 정형외과엘 같이 갔다. 의사선생님은 초기라며 약만 처방해 주었는데, 나는 시골 사느라 병을 키워 수술을 해야 했던 것 같아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서울 사는 사모님들'보다는 '시골 사는 아짐들'이 훨씬 더 건강한 건 사실이다, 허리는 앞으로나 옆으로나 뒤로 좀 휘고 걸음걸이는 뒤로 젖혀젖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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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이웃에 사는 정희언니를 찾아보러갔다. 늘 엄마처럼 따뜻한 분이어서 오랜만에 오가도 방금 헤어졌다 다시 만난듯 살갑다. 형부가 암이라고 들었는데, 수술하자는 의사더러 목사님은 '나이 90에 무슨 수술요? 천수를 누렸으니 너무 아프면 진통제나 놓아주시오.' 하시더란다. 지금도 형부는 너무 건강해 보여 죽고 사는 건 의사 문제가 아니고 하느님 소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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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우체국 실손보험을 연장할까 말까 고민해 왔는데 '우리 큰딸', "죽은 라자로도 살리시는 예수님을 믿는 터에 무슨 걱정이세요?"라며 고민하지 말고 그냥 깨버리란다. 대단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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