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4일 화요일, 간밤에 눈이 내렸다, 조금


23일 입춘(立春). 집 주변에 심어진 매화나무 가지 끝마다 바알갛게 봄물이 오르기 시작하니 내 가슴도 설렌다. 바람 끝이 차다 해도 추위를 뚫고 당당히 걸어나온 봄기운이 시린 기운을 죄다 걷어낸다.


[크기변환]20210203_173531.jpg


언 강 풀립니다.

겨울산 완강한 어깨 강물에 기대어 순하고

철새떼 흐린 하늘 잠잡니다

관목숲 겨우내 갇혀 있던 안개

풀려나 울울한 모습 드러내는 강안,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얼음 투명한 살 속으로 실핏줄 내렸습니다....(김윤배, “입춘 이후에서)


예년 같으면 마을회관에 모여 대동계도 하고 당산나무 할매에게 고사도 지낼 즈음인데도 올해는 모든 행사가 아직도 강가에 남은 얼음처럼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도 마을 방송에서는 농협순회차가 설쇨 준비차 마을회관에 와 있다고, ‘모다 나와 설차비 하이소!’란다. 나이들 먹고 힘이 달려 이젠 군내버스로 장보러 갈 힘도 없는 할매들이 밀차를 밀고 비칠걸음으로 트럭에 모인다. 자식들도 손주들도 안 오고 큰아들 한 개만달랑 와서 제사나 모시고 갈 꺼라면서도 몸에 밴 설레는 마음은 주체할 길이 없다.


[크기변환]20210204_071617.jpg


어제 함양읍에 다녀오는데 마을회관 앞 운동기구에서 매달리기와 달리기 운동을 하던 검은굴댁과 드물댁이 크게 나를 반긴다. 강원도에서 씨감자가 와서 드물댁이 우리집에 여다 놓았다고, 농협에서 회원들에게 주는 선물이 나와서 그것도 갖다 놓았노라고 자랑한다. 현관 안에 놓고 간 씨감자 상자를 오늘 오후에 보스코가 식당채 뒤꼍 보일러 창고에 갖다 넣으며 들어보니 제법 무거웠다는데 그걸 머리에 이고 끙끙 언덕길을 올라왔을 드물댁이 참 고맙고로! 올 텃밭에 드물댁이 심을 씨감자도 나눠줘야겠다.


[크기변환]20210204_212627.jpg


요즘은 산불조심아저씨의 확성기에서 하루 종일 낯선 목소리와 멘트로 소설을 쓰는 아줌마의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나서 이장님이 방송을 해도 귀가 집중이 안된다. 이빨 빠진 영감의 경상도 사투리로는 도저히 의사소통이 안돼 그 방송은 그저 소리일뿐, 가밀라 아줌마에게 전화를 해서 뭔소리냐 물어야 통역을 해준다. 


겨울이면 마을회관에서 밥을 해 먹으라고 면에서 쌀을 주는데 올겨울 모이질 못해 밥을 해 먹지 않아 남은 쌀로 떡국떡을 뽑았다는 방송이 나오고서 이번에도 드물댁이 우리 것만 아니고 아래층 진이네 몫까지 커다란 떡봉지 두 개를 이고 언덕을 올라온다.


[크기변환]20210204_212847.jpg


어제도 오늘도 읍내 한의원에 나가 왼손의 장지와 검지 사이에 주사를 맞았다. 물건을 쥘 수가 없어 진찰을 받았더니만 그곳 물렁뼈가 튀어나오고 염증이 있단다. 그동안 '명인당 한의원' 원장님은 둘째 딸까지 낳아 기르고 있어 내가 그 한의원을 안 간 지 여러 해 되었다는 말이겠다. 여전히 친절하고 자상하고 따뜻한 의사다. 오랜만에 소담정 도메니카가 휴천재에 올라와 점심을 함께 들고 내가 기운이 떨어져 보인다며 링거도 놓아주었다. 


[크기변환]20210204_132603.jpg


오늘 읍으로 나가던 길에서 살짝 언 비탈에 바퀴가 미끌어지곤 해서 타이어 집에 들러 네 바퀴 다 갈았다. 가계부를 살펴보니 2년 반이면 한번씩 소나타가 신발을 새로 사 신는다.


읍내 가고 나 없는 새에 누가 보스코의 서재 문을 세차게 두드리더란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이번에도 드물댁이었단다. 함양군에서 재난지원금  준다고 면직원들이 마을회관에서 돈을 나누어준다고, 우리만 안 타갔으니 도민증’(주민등록증)이랑 도장 갖고 와 빨랑 받아가라는 전언이었다지역화폐가 1인당 10만원씩 나왔다. 드물댁 참 충실한 친구다. 


[크기변환]20210204_212706.jpg


저렇게 열심히 남의 일로 쫓아다니니 그 또래 아줌마들 중에 그미가 제일 건강할 수밖에 없다. 보스코의 전화연락을 받고 마을로 돌아오며 회관에 들렀더니 과연 면직원들이 일일이 사람을 확인하고서 지역화폐 봉투를 나눠주고 있었다. 처음엔 이재명 지사의 이 '지역화폐' 정책을 보수언론들이 경제교란이니 좌파경제니 하며 공격하더니만 경기도에서 시작한 지역화폐가 지금은 모든 지자체에서 앞다투어 통용되고 있다.


[크기변환]20210204_212925.jpg


드물댁은 어제가 입춘이었다고, 이젠 감자 눈도 갈라서 감자도 놓고 강냉이도 심고 '할 일이 쳐쌌다'며 신이 난다. 가만히 보니 씨감자 이고, 설떡을 이고 우리집을 오르내린 건 봄농사를 위해 몸을 푸는 워밍업이었고, 입춘대길(立春大吉)하여 농사철이 다가와서 제일 신나는 사람이 그미인 듯하다. 우리 딸 넷은 봄이 와서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할까 봐 지금부터 걱정이지만 설레는 드물댁을 보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난다.


[크기변환]20210131_14172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