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1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아침. 전날 불던 회리바람이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뒷끝 작렬이란 말은 바로 이런데 써야 한다. 다행히 내려쌓인 눈을 송두리째 날려버려 녹거나 미끄러지거나 다시 빙판을 만들 눈발은 남아 있지 않다문정리는 바람이 적은 곳이지만 서북풍이 불어닥치면서 마을의 왼편 대숲과 오른편 솔숲이 누가 더 음산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겨루는 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먼 데서 친구가 온다는 전화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청소하던 손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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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님은 내가 아팠다는 소식에 위문차 오셨을 텐데 환자가 너무 싱싱해서 어리둥절했을 게다. 언제나처럼 그 가족은 주부인 내가 일을 안 하도록 만드는데 만남의 우선 목적을 두어 올 때마다 늘 일용할 양식을 들고 다닌다


오늘은 임실의 이름있는 식당에서 사온 닭죽과 부대찌게가 미션의 준비물. 그는 오자마자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며 냄비에 닭죽부터 데웠다. 김치와 석박지만 꺼내면 끝인데 자상하게도 죽 그릇 세 개에 공평하게 나누어 담고 닭뼈도 정형외과 의사답게 핀셋 두 개로 손에 묻지 않고 섬세하게 발라내어 고기도 저울에 달 듯 세 그릇에 나눠 담는다. 그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나는 메밀묵만 김치와 들기름에 김을 넣어 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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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집에 온 것은 내 문병에도 뜻은 있었겠지만 실은 보스코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인 문선생님 평대로, ‘남의 이야기를 드는데 그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흔치 않은 게 보스코라니,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김원장님과 보스코는 드물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매일 책상 앞에서 곰팡이 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김원장님이 다녀가면 그에게도 생기가 돌아 나도 고맙다, 남의 손으로 마련된 맛난 음식도 얻어먹고.


날이 풀리면서 시금치를 거두는 손길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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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영숙씨네 한과 만드는 운림원에 갔다. 10월말부터 만들어 놓은 조청에 찹쌀과 콩가루를 반죽하여 말린 판을 튀겨 만든 유과는 한번 먹어보면 누구나 다시 찾는다. 설빔을 보낼 지인들 앞으로 주문을 하고 왔다. 나야 만들다 부서진 파지를 공짜로 얻어다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으니 역시 친구가 좋은 거다


영숙씨의 남편 이선생은 5년전 위암으로 위장 전부를 잘라내면서 두 달 후 천국행 특급열차가 예약되었다. 의사의 그런 말에도 영숙씨는 "경상도에서는 보기 드문, 최고로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편인데 '난 절대 못 보낸다!', 아니 '절대 안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온갖 좋은 것을 구하고 달이고 먹이고 하던 아내의 정성과 사랑이 커다란 낫을 들고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죽음의 천사 손에서 남편을 건져내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리고 있다.  '단 한번 살고 가는 인생 모두들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는 찬탄을 주면서, 나만 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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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물탱크는 3층에 있다. 지하 120m에서 퍼 올린 물은 그 물탱크로 올라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1층엔 수압이 괜찮은데 2층엔 가압모터를 돌려야 물이 제대로 나온다. 그런데 물탱크에 장치한 가압모터의 소음이 너무 커서 1, 2층에서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우리가 긴방이라고 부르는, 물탱크 아래방에서 자는 사람을 소음으로 고문한다. 가압모터를 점화하는 스위치가 1층 진이네 부엌에 있다 보니 그때마다 내려갈 수도 없어 3단 스위치를 설치해서 밤에는 소음이 안 나오게 1,2층에서 켜고 끄겠다고 나더러 읍내 나간 길에 전선과 스위치를 사오라고 했다.


안면이 있는 '중앙전기공사'엘 갔다. 사장님은 우리 손으로 설치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림을 그려주고 자기 손으로 선을 연결하고 두 개의 스위치에 전구까지 연결해 주었다. 연결법을 공부시키고 나한테 시험까지 치르게 하였다. 이 바쁜 세상에, 이 경상도 땅에, 이렇게 착한 상인이 있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제법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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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스코의 영명축일. 제네바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비롯해서 보스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문자로 전화로 이멜로 축하를 해주었다. 수호성인에게서 보호를 입는다는 가톨릭 신앙도 아름답지만, 보스코처럼 4형제가 물심양면으로 수호성인 돈보스코의 은덕을 입은 경우는 교회사에서도 드물 게다. 이탈리아 산업혁명 시대에 토리노의 사제 돈보스코(1815~1888)가 시작한 청소년교육사업이 살레시오 수도회로 설립되고, 그 살레시오회가 1950년대 한국에 진출한 덕분에, 1957년에 고아 된 보스코의 4형제가 그 선교사들의 손에서 먹고 자고 중고등학교를 공짜로다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94


가림정 임신부님은 보스코에게 축하 미사를 집전해주셨고 미루가 준비해온 케잌도 잘랐다. 김원장님이 사다 주신 부대찌게를 끓여 임신부님 오누이와 우리는 오붓한 점심도 함께하니 국가 시책에 따라 5명 이하의 식사가 됐다. 아이처럼 행복해 하는 그가 보스코 성인에게서 받은 제일 큰 은덕은, 내 보기에,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기뻐하고, 남들에게 받은 호의와 은혜에 늘 감사하는 심성이다. 그 덕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은 바로 나다.


산청 오가는 길에 봄기운이 돈다. 집에 와서 보스코가 쉬는 틈에 나는 배롱나무와 은목서를 전지하였다. 배나무밭도 전지할 때도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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