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8일 목요일, 비오다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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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다락으로 오르는 층계막의 풍경소리가 2층 반대편 침실에도 들리는 걸로 보아 바람이 퍽으나 소란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급강하더니 태풍이 몰아치는 중이다. 


지난 열흘 내내 우유에 밥을 끓여 먹었다. 이른바 우유죽’. 이탈리아 의사들은 배탈이나면 그 처방으로 쌀로 묽게 우유죽을 끓여 먹으라 처방한다. 우유라면 먹기도 전에 배탈부터 나는 사람이 많은 한국이지만 평생 우유를 먹는 서양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겨울내내 휴천재 마루에 꽃밭을 이뤄주는 화분들이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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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염소젖을 먹었다. 아버지는 우리 다섯의 건강을 위해 어디선가 젖짜는 양을 데려오셨다. 안성 공도에서였다. 염소 풀 뜯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공도중학교 가사 실습지가 끝나는 곳에 무덤들이 있었고, 그때는 조상을 모시는 정성이 지금과 달라선지, 거기 가면 부드러운 잔디와 클로버가 많았다. 염소는 풀을 뜯거나 되색임하고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으며 석양 너머로 시골소녀가 꿈꿀 수 있는 머나먼 세계를 동경하였다


남동생 호천이처럼 집안에서 개똥을 치우거나, 닭 줄 모이로 개구리를 잡으러 논두룩이나 또랑을 작대기로 두드리고 다니는 일보다는 훨씬 쉽고 점잖은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염소를 먹이면서도 손에서 책을 안 놓는다고 기특해 하셨는데, 공부하는 척은 하지만 대부분 재미있는 소설이기에 내 속으론 좀 염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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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염소는 매일 파란 풀만 먹고서도 우리에게 하얗고 고소한 양젖을 내주었다. 새벽기도에서 돌아오신 엄마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염소의 젖을 감싸서 달래고는 위로 살짝 올렸다 밑으로 젖을 훑는 식으로 젖을 짰다. 가끔 젖몽울이 덜 풀리면 뒷발질로 엄마를 걷어차든지 젖 짜 놓은 통을 뒤집어 엎곤하였다. 가끔은 나도 그 일을 맡았는데 젖을 만지는 감촉이 참 부드럽고 친근했다


염소젖은 매일 두레박으로 거의 하나가 나오는데 그걸 냄비에 팔팔 끓여 각자 두어 잔씩 마시게 했고 나는 늘 거기다 밥을 말아먹곤 하였다. 소금을 조금 넣는 것 외엔 가미가 없었고 깍뚜기 한두 쪽이면 아침이 끝나고 학교까지는 교장사택에서 3분 거리였지만 그래도 간당간당 지각을 겨우 면했었다. 우유에 말아 놓은 밥을 보고 보스코는 토하는 시늉을 하지만 지금도 내겐 제일 맛있고 속 편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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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혈액검사를 한 터여서 오늘 결과를 보러 읍에 나갔는데 간수치, 콜레스테롤, 당수치, 혈압, 모든 게 정상이란다. 위경련 뒤 한 열흘 음식 절식을 한 게 내 건강에도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먹는 것을 잘하고 멈추는 것을 잘해야 건강하다, 미루네 '팔보식품' 표어에 한 표를 던진다.


보스코가 머리를 깎은 지 달포는 지나 완존 타잔아저씨. 어제 날씨가 풀릴 대로 풀려서 점심 후 지난 초겨울 배나무 밑에 날라다 놓았던 퇴비를 땅 파고 묻는데 보스코 머리가 쫌매도 될 만큼 자라 있었다. 오늘 내가 병원 가는 길에 머리를 깎기로 하고 읍내에 함께 갔다.


일이 끝나고 매일 집에서 먹는 모범식탁에도 한번쯤은 외도를 하고 싶어 중국집엘 갔다. 그는 짬뽕을 먹고 나는 탈이 안 날까 걱정을 하면서도 우동을 먹었다. 평강이 고향인 아버지 대부터 식구 모두가 밀가루를 좋아하여 하루 세 끼 다 국수를 먹어도 좋다는 게 우리 오남매. 지금까지 밀가루 먹고 탈난 일은 없다는 신앙을 갖고 점심을 먹었는데, 과연 이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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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엄마가 유무상통실버타운엘 가실 적에 6.5Kg짜리 소형 세탁기를 사드렸다. 그리고 3년 전 엄마가 요양 병원으로 옮기시며 단벌 옷에 신 한 컬레를 인생의 마지막 소유물로 남기시고 나머지는 다 처리하거나 버렸다. 나와 보스코 두 식구 빨래로는 휴천재의 커다란 세탁기가 부담스러워 엄마가 쓰시던 세탁기를 가져와 그동안 잘 썼다. 그런데 100세를 맞은 엄마의 건강이 속절 없이 무너지듯이 세탁기가 오늘 날짜로 망가져버렸다. A/S맨이 와서 뜯어보고선 "너무 오래되고 부품도 없으니 미련없이 버리시라"는 충고만 남기고 출장비도 안 받고 가버렸다. 일개 가전제품인데도 왜 이렇게 헤어지기가 서글플까? 마치 엄마를 폐기처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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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도 눈보라가 태풍급 바람을 타고 휴천재 문이란 문은 모조리 흔들어댄다. 세탁기의 종말, 요양병원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시는 엄마... 정형달 신부님, 선배언니 남편 목사님처럼 부디 문상오지 말라는 유가족의 부음을 달아 영이별의 손을 흔드는 이들... 떼어 놓지 못하는 모든 미련을 산산이 날려버리려는 회리바람에 인생에 중요하다는 그 무엇도 견디길 포기해야 하는 스산함을 느낀다어느 영화 대사처럼, 역시 ‘죽음은 삶을 배우는 가장 힘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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