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일 목요일, 흐리다 오후엔 비뿌림


어제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며 궁리를 했다. 한달간 속이 안 좋았으니 병원에 가서 내시경이라도 받을까? 올해 내 건강검진의 해일 테니 어제부터 굶은 김에 아예 종합검진을 받을까? 그런데 내가 간 병원에서는 외과의 한 분이 침도 놓고 위내시경부터 심전도까지 다 하니 어찌할까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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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보스코가 나더러 병원 가자고 아침부터 서두르더니 조수석에 먼저 가 앉는다. 오늘은 장날이 아니니까 할매환자들이 좀 적겠지 싶기도 하고, 날씨가 추우니 집에들 계시겠지 하고서 나도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그러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할매들은 우선 새벽잠이 없고, 추운 겨울엔 밭일도 없는데다, 코로나로 마을회관도 닫혔으니  갈 곳이 없어 '1000원 내고(시골노인들 의료수가가 거의 이 액수로 통일된다) 병원의 따땃한 침대에 누워 온몸을 주물러주는' 물리치료라는 호강에 끌릴 수밖에.... 더구나 침까지 놔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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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이미 방문객으로 가득 찼고, 두어 시간 기다리다 내 검진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가 내시경을 해야 할까 물으려는 참인데 의사선생님은 위내시경과 심전도 할 사람이 8시 이전부터 밀려있다면서 윗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간호사에게 원장님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니까 자기도 모른다며 약 처방만 받으려면 제2진료실 선생님께 가란다


이래서 문정주 선생님의 주장이 절실하다적어도 군마다, 아니면 적에도 서너 개 군에 거점병원이 하나씩 있어 시골에서도 좋은 의사들에게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국민의료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그러고나면 이곳 할매들마저 조그만 수술도 모두 서울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 서울대병원에 가야 산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을 꺼다. 그러려면 그만큼 실력 있는 의사가 시골에 와서도 개인병원을 차리고  가정의로서 살 만하다는 인센티브와 의사 숫자가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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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내 속은 며칠째 비고 쓰라리고 아프기도 해서 원장님 진료는 포기하고 앳된 의사의 처방에 약만 받아 집으로 왔다. 병원에 와서 두어 시간을 같이 기다리며 열심히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서만 읽던 보스코에게 당신은 왜 따라 왔어요?”라고 물으니 보호자!”란다


운전도 안하고 조수석에 앉아 얌전히 오가던 보호자가 우스웠는데, "빈번한 위경련으로 한밤중에 혼자 스스로 응급실을 가려면 얼마나 서러운지 모른다"는, 이콘화가 마리아의 말이 머리를 쿵 한 대 때린다. 선교사로 혼자 있는 "남편 공소에 이불요만이라도 들고 가서 함께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니... 곁에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깊이 새기는 중이다. 혼자 남아 수십년씩 살아가는 이곳 할매들마저 "그래도 서방 그늘이 강동팔십리(江東八十里)!"하던 탄식이 그런 의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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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휴천재 주치의 도메니카의 조언대로, 오후 내내 따뜻한 보리차에 꿀을 조금씩 타서 한 모금씩 마시니 엊저녁쯤에는 몸이 한결 편해 미음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도와주고 염려해 주는 사랑스런 사람들 덕분에 나 혼자 스스로 완치 판정을 내렸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니 정말 다 나은 듯 개운하다. 커튼을 열고 이틀간 돌보지 않은 실내화단의 시든 꽃잎을 따주고, 먼지 쌓인 집안 대청소를 했다. 마루를 걸레질하는 내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보스코. "청소하는 걸 보니 전순란 살아났구만! 하기야 어제 그렇게 아프다고 허리를 새우처럼 꾸부리고 소파에 누워서도 구령을 붙이며 기어이 남편에게 티벳요가를 시키는 여자는 당신밖에 없을 거야, (그 승질머리) 어디 가겠어?"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전순란이 아니다. "여보 내가 그렇게 아파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당신한테 밥해준 건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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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늘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뒤이어 '마누라님,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내 페친 스텔라 말대로라면, 보스코가 눈 위에 하트를 그리고 '나니'를 쓸 게 아니고 (아픈 여자 먹일) 죽을 쒔어야 한다는데... 그래도 나는 눈 위에 '나니'를 쓰는 그가 더 좋다. 이런 걸 이탈리아에서는 '벨라 꼬삐아(bella copia)' 라고 놀리는데, 말하자면 '환상의 커플'이라기보다 '별꼴로 웃기는 짬뽕' 내지 '제 눈에 안경'이라는 뜻이다. 오늘 오후에는 기운이 제법 나서 부엌에서 쿠키를 구웠다. 저번 날 반죽을 했지만 위경련으로 미처 못 구운 쿠키 5종목. 주인이 몸을 움직일수록 몸속의 위장도 활기를 되찾아 제자리를 잡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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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대한(大寒)이었는데 날씨가 풀릴 대로 풀려('대한이가 소한이한테 놀러갔다가 얼어죽었다더라'는 속담대로) 오늘 오후엔 강건너 진이네 펜션에 축대쌓는 공사도 보자며 산보를 나섰다. 문우언니는 약방에 가서 황토팩을 사다가 배 위에 올려 찜질을 하라 권하고, 전목사는 납작한 돌을 주워다 팔팔 끓여 수건에 싸서 명치 끝에 찜질을 하란다


약국엘 가는 것보다 휴천강에 가서 돌을 주워 오는 게 훨씬 빠르고 실리적이다.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바닥에 내려가 동글납작한 돌을 세 개 주워왔다. 나처럼 위경련이 일어나서 필요할 사람들도 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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