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9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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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저녁만 해도 서울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데 지리산엔 겨우 1.5센티의 눈만 내린다는 예고여서 부자집 잔치에서 부스러기나 주워먹는 모양새 같아 마음이 찝찝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일찍 눈을 뜨고 혹시나 하여 마루 커튼을 젖히니, 이 무슨 하늘의 축복인가! 온 세상이 눈이불 덮고 곤히 잠들어 있다! 은백의 세계에 아직도 눈은 펑펑 계속 쏟아지고 있다! 


눈짐작으로 한 50센티 와서 아무 데도 못 가고 오는 사람도 없으려니 했는데 적어도 10센티는 족히 내렸다. 서울 친구들도 은빛나래의 어르신들도 열심히 눈사진을 퍼날랐다. 눈이 오면 겅중거리는 것은 강아지만 아닌 듯, 모두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깨끗한 얼굴로 되돌아간다, 어제의 흰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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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때 살던 경기도 가평 현리는 유난히 추웠고 눈도 많았다. 아랫목은 요가 누렇게 눓게 뜨거웠지만 윗목에 놓인 자리끼는 얼고 걸레그릇의 걸레는 손으로 들면 북어처럼 꼿꼿이 섰다. 겨울이면 한방으로 몰려 이불 하나에 우리 4남매가 함께 잤으니 어느 한쪽 구석은 늘 이불을 빼앗기고 꾸부리고 새우잠을 자야 했다


서로 가운데서 자려고 싸우다 제비뽑기를 했지만 가운데서 자다 보면 뜨겁고 답답해서 위로 기어올라 가든지 밑으로 빠져내려가 역시 윗목의 걸레처럼 동태가 되었다. 그래도 그 추위에 얼어 죽지 않고 단벌 옷에 엄마가 짜주신 털세터 하나씩으로 우리 4남매는 열씨미 싸우며 열씨미 컸다. 지금이야 다들 영상 20도 이상의 집에서 겨울을 나며 지난 세월은 까맣게 잊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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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아직도 눈이 오면 예의 그 하트병이 도진다. 그동안 눈이 안 내려 그림을 못 그려 서운했던가 보다. 나 몰래 마당으로 내려가 아직도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트를 그리고 하트 안에 그가 나를 부르는 애칭 '나니'를 써넣는다. 삐툴빼툴 그림이지만 나이 여든에도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퍽 다행이고 그 사랑을 받는 여자역시 행복하다. 아랫층 진이네가 보고서 늙은이들이 남사스럽게...’라며 흉볼까봐 빨리 눈이 펑펑 내려 그림을 덮어주기를 바랬다.


이웃 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댁에 울산에서 아들과 손주가 다니러 왔는데 몸이 아파서 보건소에 갔더니만 확진자라는 판정을 받았단다. 할머니야 걸릴 만했지만 나머지 동네 사람 스물두 명도 모조리 검사를 받았다는 얘기가 돌면서 우리동네 아짐들도 서로를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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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동네도 그 집 셋을 빼고는 모두 음성이라고 판정받아 가슴을 쓸어내렸다지만, 마을 이장 방송에 한마디가 더 따라 붙는다. "이웃 마을에서 봤듯이, 외지에서 자손들이 다녀가면 일 납니데. 명절에도 아그들 오지말락카이소." 참 서글프다.


어제 오후에 부엌에서 쿠키 반죽을 몇 가지 하는데 몹시 추웠다. 휴천재 부엌에는 아예 난방을 않는다. 점심에 깍두기에 들기름을 넣고 맛있게 밥을 비벼먹었는데 갑자기 위장이 딱딱하게 굳더니만 뒤틀리고 아프다


신혼시절부터 몇 차례 위경련을 겪은 터라 덜컥 겁이 나서 소화제도 먹고 제산제도 먹었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겨우 이층까지 기다시피 올라가 긴방의 뜨거운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지만 배는 더욱 뒤틀린다. 이렇게 아프면 한밤중에라도 응급실로 실려가야 하는데 눈이 녹다가 얼어붙었다면 이 산길을 운전하는 것도 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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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못해 아래층 진이아빠에게 부탁하여 함양읍 유일한 야간 응급실이 있는 성심병원으로 달렸다. 마을길은 아침에 진이아빠가 온통 빗자루로 쓸어내어 휴천재까지는 차가 오르내릴 수 있다. 서울의 우리동네라면 한전병원5분이면 가는데 휴천재에서 함양읍은 30분이 걸려 가도가도 당도하지 않는 거리로 멀기만 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픈 배를 끌어안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동안 그 병원의 평판은 뒤로 치고, 그 병원응급실 빨간 십자가만으로도 이젠 살았다!’ 싶었다. 보스코가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먼저 들어서며 위경련이요!” 외치니 당직 간호사 남자가 당신이 환자요?”라며 코로나 예방으로 그의 귀에 체온을 재면서 위경련으로 응급실을 다 오다니.”하며 볼멘 소리를 한다. 그 건장한 남자는 평생 위경련을 한번도 안 겪어 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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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관에서 갓 제대한 듯한 애띤 당직 의사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내 복부를 꾹꾹 눌러보고는 무슨 주사를 놓으라 한마디 하고는 들여다보던 컴퓨터로 눈을 돌린다. 야전병원 분위기 응급실에 다섯 개쯤 병상이 있었는데, 처음엔 링거라도 맞고 가야겠다 싶었지만 겨울 한데 같은 응급실 분위기에 정이 떨어져 '주사 맞고 약 지었으니 집에 가서 쉬겠다'고 얼른 나왔다집에 와서 따순 방에 누우니 역시 좋다. 진통제 기운이 퍼지며 잠이 살살 찾아왔다


문제는 오늘 아침부터였다. 먹는 음식을 냉수까지 내 몸이 모조리 거부한다. 물까지도 먹는대로 토하니 내일은 읍내 홍인외과에 가서 위내시경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산속에 사는 일이 이럴 때는 좀 불편하지만 생각해보면 산에서나 도시에서나 사람들은 태어나고 사람들은 앓고 또 죽는다


밤에도 메슥거림과 토기가 끊이질 않는데 보스코가 어디서 알아냈는지 사탕을 주면서 빨아 보란다. 과연 신통하게 토기가 가라앉으며 슬슬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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