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일 일요일, 흐림


아침에 반짝 해가 나더니 온종일 구름 덮인 하늘에서 엄청난 눈 더미라도 쏟아부을 듯하다. 해지는 시간이 529분이니 요즘 하루에 1분씩 늘어난다. 춘분 지나 하지가 오려면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낮이 길고 모든 생물이 활발히 움직이는 여름을 좋아한다. 서울에는 눈이 오고 날씨도 엄청 춥다는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몸이 움추려든다.


하종희 소장님이 보내준 '지리산 새해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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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도, 송년의 밤도, 새해 첫날도 우리 둘이서 조용히 보내본 건 난생 처음이다. 유튜브 미사라도 보면서 신앙인다운 낌새를 보이려고 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펀치에 가장 심하게 휘둘리는 것은 종교계가 아닐까? 가톨릭의 경우, 앞으로도 주일 미사참례는 영상으로 대체하고, 고백성사는 핸폰이나 문자로 주고받고, 성당모임은 화상회의로, 헌금은 자동이체로 대체한다면 성직자들의 삶이 가장 황폐해질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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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은 주의 공현대축일.’ 유럽에서는 아기 예수님이 동양박사의 방문을 받으신 날이라 하여 16일은 공휴일이다. 산타클로스가 없던 유럽에서는 베파나(Beffana) 할머니가 빗자루를 타고서 오는 날로 잡아 착한 아이에게는 좋은 선물을, 말썽꾸러기에게는 석탄을 한 자루 주고간단다. 진짜 석탄 모양의 검정사탕이 있어 양말을 걸어놓으면 그 안에 넣어주는데 석탄을 선물받은 아이는 통곡을 한다. 우리나라는 16일이 낀 주일에 이 축일을 지내니까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성당엘 갈 수 없으니 유튜브 미사를 보았다. 오늘 하느님의 아들이 처음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찾아 나선 이방인들에게 공식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우리가 그분을 찾지 않고 안주하고 있을 때 그분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신다.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늘 주변에 그분이 귀히 여기는 사람들을 살펴볼 일이다


보스코가 새겨본 '공현축일' :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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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 홀로 계시는 엄마가 곡기를 끊고 링거에 의지하신다고 연락이 왔다. 10년 전 엄마가 연명치료를 거부하셨다지만 자녀 두 명 이상이 요양원에 와서 서류제출로 확인을 해야 그 의향이 유효하다는 대건효도병원의 통지. 코와 목을 뚫어 6년을 더 연명하시고 106세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지켜보시면서 엄마가 당신은 절대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올해로 엄마 나이 100세가 되셨으니 아버지가 68세에 돌아가신 후로도 40여년을 더 사셨다. 내일 당장 우리 형제들이 미리내 실버타운 '유무상통'의 요양병원에 집결하여 어머니의 연명치료거부를 시행할 여부를 확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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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키가 작아서 아버지의 바지나 와이셔츠를 새로 구하면 언제나 엄마가 소매와 바짓단을 줄이셔야 했다. 그때마다 "키도 꼭 난쟁이 똥자루 만해서..."라고 투덜거리곤 하셨고 아버지야 그런 말을 조금도 괘념 않으셨고, 그 키로 연식정구를 하시면서도 당신의 폼을 학폼이라고 뽐내다 이모들한테서 무슨 학이 저리도 다리가 짧다냐?”는 놀림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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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어제도 보스코가 선물 받은 잠옷의 길이를 장장 10cm는 줄여야 했다. 며칠 전에는 바지도 줄였다. 내가 뭘 하나 보러 온 보스코더러 '난쟁이 똥자루씨!'라고 놀렸더니만 '그 난쟁이 똥자루가 별탈없이 순란이를 데리고 사는 걸 보면 대단하지 않아?'며 껄껄 웃고 만다. 내 친구 말마따나 '키 크고 훤칠한 미남'이라는 포장지는 결혼식장에서 콧대 높은 친구들 앞에 내 신랑 보여주는 딱 두 시간용이지 그 담엔 평생 필요 없더라는 말이 50여년 살면서 새삼 확인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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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올해로 80 고개에 들어섰으니 100세의 엄마만 아니고 이젠 우리한테도 서서히 차례가 다가옴이 느껴진다. 휴천재 앞산 옆산의 솔숲은 늘 푸르러 보인다. 지는 잎과 새로 난 잎이 가득하기에, 누가 나고 누가 지더라도 변함없이 푸르기에, 사람들은 누가 새로 태어났음을 기뻐할지언정 떨어지는 잎을 위해 울지는 말자. 다만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더라도 늘 그분의 품 안임을 깨우쳐주는 종교신앙이 우리를 다독여 주심에 감사하자.


때로는 막히고

때로는 도달하기도 하는 너의 삶은

한순간 네 안에서 돌이 되었다가

다시 별이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해질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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