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2일 화요일, 흐림


마음이 참 복잡하다. 세상도 뒤숭숭하고 코로나19만으로도 맥이 빠지는데 누구는 갑자기, 누구는 오랜 병상에서, 누구는 가까이서 누구는 멀리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간다. 요 며칠 사이에도 수복씨 막내아우여서 나도 막내처럼 아끼던 진균이가(60세) 갔고, 보스코가 잔정을 보이던 레지나 수녀가 떠났고, 어제는 계모님이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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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에서 지내시던 분이니 자식들도 지쳐갔으리라. 계모님은 86(보스코보다 딱 8살 많다)고 울엄마는 100세다. 우리 엄마도 요양병원에 계시며 코로나 때문에 창너머로 글씨를 써서 겨우 의사소통을 하는데 대화 중에도 기운이 없어 고개를 꺾고 졸고 계셔 우리를 안타깝게 하신다. 효자인 내 동생 호천은 딱 이레만이라도 집에 모시다가 보내드리고 싶단다. (그 일주일을 무엇인가로 가득히 채워 동생의 여생이 그 추억만으로도 행복할지는 모르겠다.) 


나 같으면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퇴색된 상태에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호흡도 섭생도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곡기를 끊고 싶다. 엄마는 연명치료거부’를 친필서류로 작성해 두신 참이다. 보스코도 며칠 전 작은아들이 휴천재에 내려온 길에 자기 장례와 사후처리에 대한 메모를 작성해두었다. 

계모님의 부고를 받고 보스코 혼자서 하던 말. “철없을 나이에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 그 남자와 사랑의 모험을 감행했는데, 생활능력이 전무하고 자기만 아는(시아버님은 3대독자셨다) 남자를 평생 먹여 살려야 했던 여인, 다섯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모진 인생을 살고 간 여인.” 한 여인의 곤고했던 삶에 대한 그의 깊은 연민이 실려 있다. 노년을 섬긴 큰딸 정훈과 양서방의 효경에도 고마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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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여년, 보스코가 계모님과 그쪽 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름처럼 차가웠다. 1학년에 엄마의 임종을 혼자 지키고(의사가 내린 병명은 '화병에 영양실조'였단다) 동생들이 고아원에 보내져서 기숙사에 살던 맏아들로서 혼자 아우들을 보살펴야 했던 아픔 때문이리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처럼, 아우들은 살레시오 신부님들의 손에 받아들여져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기숙사에서 공짜로 학교를 다녔고 커서는 사회생활에서 자기 몫을 다하였다.)


내가 아버님 생전 25년간을 지켜보기로도(1998년에 돌아가셨다), 돈 한 번 벌어본 적이 없으셨을 아버님이지만 계모님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무슨 일로 서운하여 큰아들네 집에 오셔서는 이참에는 좀 있다 가겠다.”고 다짐하셨다가도 하룻밤을 지나면 나한테 아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하시며 서둘러 전주로 내려가셨다. 우리 두 아들이 제 아빠더러 마누라 도착증' 환자라고 부르는 증상이 대물림했으려니 했다.


그쪽 큰고모가 어머니 유골함을 선산 아버지 옆에 모실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장성 선산에는 보스코가 40여기 들어갈 봉분형 납골묘를 마련해둔 참이다안 된다.”는 보스코의 답변이 매몰차게 들렸으리라. 내 보기에도 아직 이장을 안 한 우리 어머님(1957년부터 지금까지 광주 방림동 옛 묘지에 계시다)도 아버님 유골 옆에 계시기 싫어하실 것 같지만 더구나 계모와 나란히 는 더욱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입관식에 가서는 그쪽 배다른 형제들에게 여러분은 성씨(成氏) 집안이니 향후 유골함으로는 선산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섰다. 먼 훗날 그들이 시립묘지의 매장기간이 끝나고 선산으로 찾아들어올지는 모를 일이다.


화장하여 무의 세계로 떠나보내고 슬픔도 미움도 다 내려놓을 시간이다. 아마 그분도 다시 태어난다면 전혀 다른 생을 살고 싶으실 게다. 막내 훈이서방님 부부는 평택에서, 셋째 찬성이서방님은 광주에서, 우리 부부는 함양에서 전주로 가서 입관식에 참석하였다(둘째서방님은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났다.). 


보스코가 계모님의 시신을 염하는 의식에서 맏아들 노릇을 했다. 내일 아침에 있을 발인과 화장, 납골당 안치는 그쪽 동생들에게 맡기고 이쪽 3형제는 70대 이상의 소위 '기저질환' 환자들이어서 코로나 감염의 공포를 핑계로 바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내 보기에 우리의 그집과의 인연은 딱 여기까지 같다. 더 이상 과거를 돌이켜보고 아파할 여력은 바닥이 났다. 보스코도 이젠 나이 80이 되니 자기 떠날 채비를 차리며 남은 날을 살아야 하리라


상가에서 돌아와서는 우리가 장례식장을 다녀왔으니 민폐를 안 끼치려 주간 자가격리를 하겠노라'고, '은빛나래단의 크리스마스 미사엔 참석 않겠노라'고 알렸다. 나라에서 요구한 '5인 이상 만나지 말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따르게 됐다.

전주에 갔다 와서는 시든 풀나무같이 맥을 못 추는 보스코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춧대를 구해다 차를 끓였다. 종수씨가 보내준 동영상에서 목사님 몇 분이 고춧대로 끓인 차가 목 아픈 데나 코로나에 특효약이라는 얘기에 솔깃해서다. 고추는 탄저병 등 병이 많아 그것을 이겨내려 스스로 약성(藥性)을 만든다나? 탄저병은 균이지 바이러스가 아니지만 속는 셈 치고 마을을 뒤져 밭가에 뽑혀던져진 고춧대를 주워다 깨끗이 닦아 차를 끓였다. 내가 들인 정성이 아까워 보스코에게 먹이긴 먹였는데 왜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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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지. 보스코가 좋아하는 새알팥죽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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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도 쓸데없는 걸 먹인다며 짜증을 내는데, ‘고춧잎 맛이니까, 이상한 건 아니니까 마셔보라고 얼르고 달래고 협박하여 겨우 한잔을 먹였더니만 그냥 잠들어 버렸다. 굳이 고춧대차를 안 마셔도 잠 하나는 끝내주는 보스코인데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마치 곤히 자는 사람 깨워 수면제 먹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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