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0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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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옆방에서 잠들어있다. 조용히 우리 방문을 여닫으며 커다란 보물 보따리가 쉼쉬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옆방을 보면 그저 뿌듯하고 좋다. 올해는 성탄이나 연말에도 가족끼리 모이지도 말고 찾지도 말란다. 공동체 파괴, 가족파괴지만 더 큰 상실을 피하려면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불평을 하거나 어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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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오늘 공소에서 빵고신부는 주일미사와 성탄판공을 봐주며 "이곳에 오려고 금요일에 코로나검사를 받고 어제 음성이란 결과를 받았다"고 공지한다. "나나 여러분이 안심하도록 마음을 썼으니 마을 이장님께도 그리 말씀드리라"고도 했다.


아들이 와서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도정 사는 친구들 세 집은 우연하게도 딸만 둘씩이다. 어쩌다 그들 앞에서 전화를 받으며 ", 그래 아들!" 하면 그들은 몹시 떨떠름한 표정이다.  자기들도 전화에 "음, 우리 딸!"하고 응답해 보지만 신명이 안 난단다. 얼마 전 전주로 이사간 윤희씨가 선물해 준 박성우의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시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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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우리 딸 아들이야?' 물으면

딸애는 더 신이 나서 '아들! 아들!' 한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딸의 아들이 된다

허나, 해 바뀌어 고작 세살배기가 된

딸내미한테까지 내가 아들로 보이다니

그렇다면 나는 세 여자의 아들?

어쩌다 안부전화라도 걸면 '아들!'하면서

반가운 표시를 하는 노모의 아들이고

'우리집 큰아들!' 하면서 가끔 놀리는

아내의 철없는 아들이다.

여기서 딸내미까지 날 아들이라 부르니

나는 졸지에 어머니가 셋이다

아들 노릇은 좀 못해도 그냥 아들이니까. (박성우, 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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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신부가 오면 우리집 전자기기 전반이 신천지를 만난다. 보스코의 데스크탑과 모니터가 망가져 노트북으로 겨우 번역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 것을 사와 설치를 해주었다. 돈이야 내가 내지만, 돈이 있다고 쉽게 바꾸거나 설치할 도리가 없는 일인데 이런 때 꼭 필요한 존재가 바로 아들이다. 이 아들은 나만 애용하는 게 아니고 도정에 사는 체칠리아네 오래된 TV넷플릭스를 까는 기기를 구입해다 장착하는 일에도 우리 아들을 임대해주었다. 덕분에 두둑한 삼겹살 숯불구이 점심을 대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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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는 가족 전부라야 셋인데 셋이 함께 할 놀이를 찾다가 넷플릭스에서 크리스마스 연대기 2”를 같이 보았다. 보스코나 우리 둘은 워낙 유치하고 황당하여 만화 같은 영화도 좋아하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아들이 하는 한마디, “효도하느라고 드물게 재미없는 영화를 보았네.” 부모도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지만 이젠 우리 입장이 바뀌는 나이가 되었다.


교통체증을 걱정해서 토요일 새벽에 떠나서 어제 오전에 도착한 아들에게는 그가 어렸을 적에 입맛을 들였을 '폴렌타'를 마련했다. 이탈리아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였던 옥수수죽이지만 지금은 우리네 '꽁보리밥'처럼 거기서도 별식이 되었다. 


오늘 점심을 먹고서 "저녁엔 미사 드리러 가야 해요."하며 미련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데 그게 바로 아들이다. 우리의 가슴은 갑자기 텅 비고 찬바람이 휘돌아나가는데 떠난 아들의 가슴에 우리는 접혀진 그림책이리라. 아들은 앞을 보고 걸어나가고 우린 뒤에서 지켜보는 그림이니까.... 우리도 그렇게 부모를 떠나왔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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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오후에는 농협지점장이 들러 차를 마시고 갔다. 여자로서 홀몸으로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감당하고 승진을 감행하는 한 여인의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서양에서는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투지를 '암사자'로 표현하는데 과연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기운 없는 인생'들과는 달리) 홀어머니 품에서 자란 사람들은 '사랑받은 든든함'이 서려 있어 좋다. 무릇 생명은 여인들에게서 잉태되고 성장하고 보호받고 성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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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늦은 시각인데 소담정이 상주에서 왔다. 열흘 만에 돌아왔으니 집안이 너무 추울 것 같아 집 데워지는 동안 올라오라해서 며칠 전 우리가 보았던 소피아 로렌 주연의 자기 앞의 생을 틀어주었다. 우리 눈에는 익숙한 이탈리아 바닥 인생들의 모습인데 나의 고통이 더 큰 고통을 만날 때 사랑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며 그미에겐 주는 메시지가 강렬했나 보다커다란 성탄 선물을 받았노라며 고마워했다.


간단한 저녁을 먹고 헤어지며 그미가 주저하고 쑥스러워하며 한 마디. 사모님, 저 좀 안아주세요.” 작고 앙상한 그미의 등이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이 울컥 났다. 그미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미 같은 60대도, 나 같은 70대도 우리는 누구나 사람과 사랑이 필요하고, 이 성탄절에 아기 예수가 가져오시는 가장 큰 메시지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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