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7일 목요일, 맑음


어제부터 가슴 양편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번갈아 지나간다는 보스코의 하소연. 나만 보면 어딘가 아픈 곳을 찾아내서 일러주는데 '너 나 아프게 하지 마! 울 마누라에게 일러바칠 꺼야!` 라고 아픈 데에다 협박을 하는 듯하다. 그가 아프다면 어떻게든 성심껏 보살펴준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호소할 데 없이 혼자서 앓는 아이로 지냈을까를 생각해서다. 위장 내시경을 들여다보던 친구 의사가 보스코는 옛날에 십이지장궤양을 심하게 앓다 스스로 치유된 흔적이 있다고 내게 일러준 적 있다. 중학교 때 죽어라 아팠는데 혼자서 참고 참았다는 기억.


크기변환_20201217_173105.jpg


걸핏하면 여기 아파’, ‘저기 아파를 호소하는 그를 즉각 낫게 하는 비결을 내가 터득한지 오래다.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의사선생님에게서 별 것 아닙니다.’라거나 위장이 더할나위없이 깨끗합니다라는 진단을 받게 하면 즉각 모든 통증과 병세가 사라진다! 오전에 읍으로 데려가 홍인외과에서 진찰을 받게 했는데 놀라운 것은 단1분간 선생님 얼굴을 보고 나왔는데도 보스코는 거뜬한 표정을 짓고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아내에게 아프다고 호소를 하면서 이미 절반은 치유되고, 의사선생님 한 마디는 그걸 확인시켰을 뿐인지도 모른다. 


결혼 초에는 찬바람 쌩쌩 일던 그의 성격이 나와의 50년 세월에 비단결로 보드라워지고 누구의 얘기든 잘 참고 끝까지 잘 들어주는 성품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가끔 도대체 개념이 없어나를 당황케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사고를 치지는 않는다.


크기변환_DSC07610.JPG


며칠 전, 시키지도 않았는데 텃밭 배추를 뽑아 라면박스에 담아 보일러실에 갖다두었다고 자랑하기에 내가 가서 보니 기름이 펑펑 터지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보일러 위에다 배추를 떡 하니 올려놓았다! 인화물질은 절대 가까이 두지 말라는 경고가 적힌 보일러 위에! 그 얘기를 전해듣던 양수산나씨가 한마디. “워낙 남자들이 개념이 좀 없어요.” ('세탁기 좀 돌려주세요.' 하면 세탁기통을 들고서 끙끙거리며 맴을 돈다든가, ‘애 좀 봐 줘요.’ 하면 앙앙 우는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더라는 농담도 나왔다.) 여하튼 보스코와의 50년은 남자란 하나 시키면 딱 하나만 할 줄 아는 모노-기능(mono-function)만 갖고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내게 철저히 가르치고 남았다.


그런 얘기를 하다 수산나 앞에서 불쑥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이 들수록 더 멋져 보여요.” 했더니만 그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 진짜 개념 없는 사람은 사모님이네.”라고 놀린다. 애들이 커서 다 떠나버리고서도 둘만 남아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남과 여의 이 개념없음에 기인하나 보다.


크기변환_20201217_175956.jpg


우리와 40년 넘게 가까이 지내온 살레시오수녀회 이무연(레지나)수녀님이 하느님 품에 가셨다는 갑작스런 부고를 어제 안젤라 수녀님이 알려왔다. 슬프기도 했지만 늘 수줍으면서도 밝게 웃던 모습이 영정사진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참 잘 사셨고 좋은 곳으로 별 고통 없이(오랜 병상에 남들을 괴롭히지 않고) 가셨으니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보스코가 1970년대말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편수위원으로 두 해 근무할 적에 함께 일한 동료로 우리와 퍽 친하게 지내오던 사이다.


크기변환_DSC07640.JPG

10여년전(2009.10.17) 레지나 수녀님의 휴천재 방문과 뱀사골 산행 

크기변환_DSC07603.JPG


크기변환_DSC07719.JPG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아 침실에 올라가 보니 쓰러져 있었고 성모병원으로 급히 실어갔지만 그만 임종했단다. 수도자나 성직자가 밤새 혼자서 임종하는 일이 간간이 있다. 독신생활에서 오는 슬프고도 초연한 부담이기도 하다. 코로나 사태로 시신도 병원에 둔 채 문상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내일 아침 수녀원으로 운구하여 장례미사를 바치고 담양 묘지로 가서 묻힌다니 우린 어느 날 그곳 묘지에나 성묘를 할 수 있겠다. 보스코가 맘으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임사라, 이레지나 두 수녀님이 몇 달 사이로 세상을 떠났다.


크기변환_IMG_3581.JPG


오늘 아침기도를 레지나 수녀님을 위한 위령기도로 바치고서 문득 보스코에게 물었다. “당신 장례식에 무슨 노래를 불러줄까?” “원신부님의 '엠마우스! 이종철 신부님이 편곡한 합창곡으로.” “어디서 죽고 싶고?” “서울 우이동 빵기네집에서!” “곁에는?” “당신 팔에 안기어...”  보스코가 아내 없인 단 하루도 못 살리라는 걱정 땜에 두 아들이 ‘우리 엄마 아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게 해 주세요.’라고 날마다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 둘도 같은 기도를 바치는 까닭은 그 사실이 우리 둘 다에게도 '자타가 공인하는' 신념인가 보다.


오늘 백광현 신부님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는데 영등포에 있는 돈보스코 직업전문학교신입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다. 정규교육이 싫거나 어려운 젊은이들이 살레시안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자립할 기회를 찾으면 좋을 게다. 살레시안들은 모두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했고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분들이니 그들에게 교육받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전이란다. 그걸 보여주는 샘플이 자기라고 자랑하는 보스코다


https://www.youtube.com/watch?v=ETnr8cTEqBg

중학교 1학년 때에 모친을 여의고 살레시오학교 기숙사에 받아들여져 중고등학교를 먹고 자고 공부한 보스코! 그러고서 대학교수도 되고 대한민국 대사노릇도 했으니 살레시안 교육이 정말 훌륭하지 않았느냐고(교황청 추기경들 앞에서도, 로마 살레시오수도회 최고장상들 앞에서도, 그리고 '한국살레시오 영성의 날'에도) 자랑해온 보스코다.


크기변환_IMG_356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