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5일 화요일 맑음


비온 뒤 추위가 따라서 나들이왔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하봉은 햇살에 흰눈꽃을 날리고 한껏 아리따운 자태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본다. 우리 동네 수은주는 어제가 -4, 오늘이 -7도니까 서울보다 4~5도는 따뜻하다. ‘산속이라 춥지 않냐?’고 다들 묻는데 여기는 강원도가 아니고 경남이고, 설악산 아니고 지리산이다


설령 눈이 내려도 최근 몇년은 쌓이는 일이 없이 아침해가 나면 싹 녹는다. 다만 여기도 한두 곳 그늘진 언덕길이 있어 군에서 나온 사람들이 염화칼슘과 모래로 손을 쓴다. 우리 사는 함양(咸陽)햇볕을 품고 있는 동네라는 이름으로 그 값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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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상봉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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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줬는데도 아직도 밭에 남아있는 배추가 열댓 포기나 되어 어젠 담양에 사는 성삼의 딸들수녀님들에게 전달하러 집을 나섰다. 열댓 분의 힘든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팔아야 생계가 유지되는데, 코로나 사태로 성당 문이 닫히고 사람들 만나기가 힘들어지면서 올해 수녀님들은 당신들 생존을 오르지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고 1년을 살아왔다. 보스코의 농담대로 산나물만 뜯어먹고 연명하다보니 담양 불태산(佛台山)[수녀님네집 뒷산]에 풀이 남아나질 않았으리라.”


성탄절도 가까워 오고 한 해가 다 갔는데, 여전히 밝고 행복한 저 얼굴들은 어디서 오는 빛살일까!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시키신 다음부터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시는 처지가 되셨으리라. 오로지 당신 얼굴 하나를 쳐다보며 평생을 사는 딸들을 무슨 수로 굶기시겠는가? 갓난아기의 고사리손이 한 남자의 손가락 하나를 감아쥐고서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그 남정이 꼼짝 못하고 아기에게 사로잡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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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불태산 앞의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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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돌아오는데 김원장님의 전화가 울렸다. 임실에서 점심에 삼계탕을 사먹었는데 너무 맛있어 우리 생각이 나 양은냄비 하나를 사서 우리 몫을 사들고 휴천재를 찾아오는 길이란다. 짠한 모습의 수녀님들과 헤어져 돌아오며 풀이 좀 죽어 있었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가 음식냄비를 들고 찾아오다니! 커다란 선물 보따리다


김원장님은 다과를 들고 환담하다 저녁도 안 들고 임실로 돌아갔지만 우리 마음엔 잔잔한 우정의 닻이 오랫동안 내려져 있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에서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은 언제나 사람들의 인정과 우정어린 보살핌을 거쳐서 내렸다. 어제 밤 넷플릭스에서 자기 앞의 생(La vita davanti a se)이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삶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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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에서 멀리 바라본 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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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피아 로렌을 직접 본 해는 2006년 바티칸 행사에서였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을 하는 아들 에두아르도 폰티를 데리고 음악 콘서트에 참석했는데 여러 대사들이 체면불구하고 행사후 그녀에게 사인을 받으러 주변에 모여들었고, 보스코는 그녀의 펜이면서도 대사의 품위를 지키느라 그 여배우와 인사만 나누었다. 그해에는 로렌이 72세의 나이면서도 누드 칼렌다를 만들어 대단한 감탄을 자아내던 일이 기억난다.


올해 11월에 그녀는 로맹 가리지 원작의 소설을 아들 폰티가 제작 감독을 하고 그녀는 늙은 퇴물 창녀로서 사창가 여자들의 아이들을 키워주는 보모로 등장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내 눈엔 해바라기(I Girasoli)의 젊은 소피아(1970), 72세의 칼렌다걸 로렌(2006)보다 86세의 늙은 창녀 마담 로사’(2020) 이미자가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대배우의 연기가 50년 세월을 여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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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에서 온 거리의 문제아 모모를 억지로 떠맡아 기르면서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과 사랑이 자라나게 만드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할망구의 팔에 새겨진 수인번호(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고 살아남은 여자)에서 모모는 타인의 상처에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모두에게 깊은 상처가 있음을 배운다


불법 입국한 이주민으로 아내에게 몸파는 일을 시키다 매춘을 거절하는 아내를 때려죽인 아버지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로 온갖 비뚜러진 짓을 서슴지 않던 모모. 그를 인내심을 갖고 받아들이며 유다인 소년에게는 히브리어를 배우게 하듯 모모는 회교도 하밀에게 맡겨 이슬람 문화를 배우게 하는 폐기(廢妓)의 지혜로움!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 소년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관객들에게 심어준다.


젊은 시절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공포와 나이에 따른 치매로 병원에 입원한 마담 로사를 모모가 약속대로 탈출시켜, 그녀가 아우슈비츠 시절의 공포를 혼자서 달래던 지하실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게 돕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있고 인생의 어떠한 바닥에서도 자기가 갈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자신만의 몫이겠다.


오늘 오후에는 걷기운동 차 찬바람을 맞으며 도정에서 내려온 체칠리아를 맞아 뜨거운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인천의 체칠리아는 오늘 가혹한 수술을 받은 터라 그 회복이 무척이나 걱정스럽다. 젊어서 혼자되어 두 아들을 키워온 그녀의 삶이야 오죽이나 폭폭하고 곤고했을까? 아들 일로 맘고생이 절정에 달한 내 친구는 이 추위 속에 어떻게 집밖을 서성이고 있을까?


어딘가 온기가 있는 바닥이면 배를 깔고 털을 핥는 길냥이들처럼, 그래도 여인들은 체온을 비비면서 고통스러운 상처를 서로 보듬어주며 이 차갑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을 함께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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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있는 국민이 장장 이태를 두고 앓아온 이빨이 (내가 일기를 올리는) 새벽 네 시에야 뽑혀나갔다. 사법부 기득권이 얼마나 거세게 저항하는지 온 국민이 목격하면서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해온 두 해였다. 


고작 '정직 2개월'이라는 속보가 떴지만 보스코가 겪은 경험(1980년)으로도 대한민국의 공안검찰은 거의 범죄집단의 체제여서 최근에 이루어진 공수처법의 통과, 윤석열 징계로  문정부의 개혁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져 가는 안도감이 든다. '조국 사태'의 가슴앓이를 비롯하여 간밤에도 자정부터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깨어나 핸드폰을 켜서 법무부 징계위원회의 결정을 확인하려던 보스코의 나라걱정이 내게는 더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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