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6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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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로 김장을 마무리했으니 뒷정리를 끝내면 동면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 있소? 나 마당에 왔는디, 좀 내려와 보소.” 인규씨가 트럭 앞에 서서 흰 퇴비 포대를 내밀었다. 우리집을 지나다니며 보니까 텃밭에 양파를 안 심었고, ‘이젠 모종도 없어서 못 심는 갑다 싶어친구 집에서 양파씨(싹)를 얻어왔단다. ‘배차도 다 뺐으니밭을 갈아줄 테니 양파를 심으란다.


양파 두 망이면 1년을 먹기에 나는 안 심고 내년에는 양파 농사짓는 친구들에게 얻어먹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매해 짓던 양파농사를 안 하자니 겨울 텃밭이 허전했다. 서운하던 차에 고맙게도 인규씨가 모종까지 구해 왔으니 마다할 수 도 없는 처지여서 덥썩 봉지를 받고 고맙다고 했다. 특히 밭을 갈아주겠다는 친절은 커다란 미끼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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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말에 귀국을 하니 밭 입구에 음식물쓰레기장이 설치돼 있고, 처음 몇 해는 그 쓰레기를 겨울이면 밭에 흙과 섞어 거름으로 써왔었다. 그런데 겨울에도 양파를 심기 시작하면서 음식물 퇴비를 섞어 밭을 갈 기회가 없었다. 여름에 그 곁에 가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러 십여년 미뤄온 일을 올해는 꼭 해결하리라 맘먹고 인규씨에게 그 동안 썩힌 음식쓰레기를 밭고랑에 섞어서 갈아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쓰레기장 밑 흙이 새카맣게 썩다 못해 지하로 스며들면 한참 떨어진 우리 지하수에까지 흘러들지 말라는 보장도 없으리라는 기우(杞憂)까지 많던 참에...


우리 부부는 아침을 먹자마자 텃밭으로 내려가 마지막 배추고랑 절반만 놔두고 배추를 뽑고, 쪽파도 모조리 뽑아서 수레에 싣고, 보스코가 퇴비 봉지를 쇠스랑으로 찍어서 끌어다 온 밭에 옮겨 퇴비를 뿌렸다. 전에는 퇴비부대를 불룩한 배에다 끌어안고서 날랐는데 그 무게가 힘에 부치자(20Kg) 작은 손수레에 실어 나르더니 그것마저 힘들자 이제는 쇠스랑으로 포대를 찍어서 밭고랑으로 끌어나르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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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밭갈이 준비가 끝나자 탈탈거리는 불도저 소리와 함께 인규씨가 등장했다. 텃밭 이랑 고랑을 모조리 갈아엎기 시작했는데 10년 넘게 쌓인 음식물쓰레기장은 놀랍게도 아주 보송하고 보기에도 탐스런 검은 흙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오물이라고 버렸는데 박테리아는 그걸 먹고 건강한 흙으로 되돌려놓았다! 대자연의 신비다. 분량도 불도저에는 한 입밖에 안돼 불도저의 단 한 번 삽질로 모든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튿날 어제 아침에는 일찍 인규씨가 내려와서 밭고랑을 내고 양파 비닐로 멀칭을 하고 있다. 양파 심을 곳은 세 이랑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비닐 씨우는 곁에서 내가 '이렇게 저렇게하면서 잔소리를 하니까 큰소리를 친다. “아짐씨는 올라 가시쇼. 다 해놓고 내가 그리울지도 모르게 사라질 테니까!” 우렁각시 아닌 우렁남정으로 나타나 힘든 일 다해주고나서 '그리울지도 모르게 사라지겠다!'는 한 마디!  무뚝둑한 경상도 남자치고 얼마나 멋진 어법인가! 시인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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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조금 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그는 간곳없고 판판한 비닐에 씌워진 밭 고랑 셋만 보였다! 곧이어 드물댁이 나타나서 도와주고. 보스코는 어제 뽑아둔 쪽파 한 수레를 새 이랑 하나에 다 심고, 호스를 끌어내려 새로 심은 양파와 쪽파에 물을 주었다! 진이엄마가 새참을 해다 준 덕분에 양파를 다 심고나서 3시에야 점심을 먹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일을 했다.


내년 여름엔 이웃에서 두 망을 얻어먹으며 올해 양파농사를 거르겠다는 심사였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렇게 올해도 양파가 심겨졌다. 내년에도 많은 지인들과 양파를 나눌 수 있겠다노동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고, '땅을 거두어 얻은'  것들은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는다는 귀한 가르침을 배우는 기쁨이 크다, 힘든 노동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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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정도 은빛나래동지들을 못 보면 뭔가 허전하던 참이라 오늘 주일에는 봉재언니네 가림정(佳林亭)으로 대림 제2주일 미사를 갔다. 임신부님도 목자가 양떼를 기다린 것처럼 우리를 반기신다


그집 강아지 '복실이'가 역시 신부님댁 강아지답게 견성교육(犬性敎育)을 제대로 받아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며 우릴 반긴다. 복실이는 미사가 시작하면 방 한구석에서 낮은 자세로 잠자듯 묵상을 하다가 퇴장성가를 부르면 그제사 주인 앞으로 다가와 머릴 디밀고 저 미사 얌전히 참례했죠?” 하듯 칭찬을 기다린다. 임신부님 서품동기 전주 김신부님이 찾아오신 길이어서 우리도 함께 단성에 나가 임신부님에게 점심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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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이 한 주간이나 지났으니 크리스마스트리도 해야 돼서 마음이 바쁘다. 유럽생활에 가는 곳마다 모아들인 성탄 장식은 꽤 되는데 오늘 오후 3층 다락에서 꺼낸 플라스틱 성탄트리를 맞추다 보니 20여년 지난 중국제 플라스틱이라 조각조각 떨어져나가 도저히 더 쓸수 없게 낡아 있었다. 아쉽지만 버릴 때가 되었다


나무를 다시 분해하여 비닐봉지에 담으며 긴 세월의 사연도 담는다. 나무야 쓰레기로 버려지지만 그 밑에서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았던 가족과 친구들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이 계절의 행복을 가슴에 깊이깊이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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