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1일 일요일, 맑음 


소나무 숲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섭게 소리지른다. ‘나오지마, 나 건들지마, 엄청 춥다고!’ 그런데 다 뻥이다. 바람은 훈훈하고 목을 휘감는 바람 끝도 한없이 따사롭다. 완연한 봄이다. 봄날이다. 그래도 혹시 백연마을 돼지막 위 황선생네 집터를 지날 때 섬뜩 찬바람을 맞으면 이제는 잠깐 사이에도 목이 잠기고 감기가 온다. 그 집터에 서러운 사연이 맴돌아선지 그 모퉁잇길은 '감기 걸리는' 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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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복도에 걸려있는 파카를 입고 목도리도 했다. 강영감은 벌써 밭터에 나와 물길을 챙기고 있고, 산봇길 시냇물이 졸졸졸 하는 쪽으로는 짙은 오렌지 색 배를 보이는 개구리가 알 낳을 자리를 찾고 있다. 윗숯꾸지 언덕도 다 오르지 못했는데 등짝으로 땀이 흐른다.


내 몰골을 지켜 본 보스코가 킬킬 웃는다. 보라색 운동화, 흰색 양말, 초록색 얼룩치마, 그 위에 꽃자주 앞치마, 그 위에 회색 목도리, 그 위에 파란색 점퍼... 총천연색에 모양도 갖가지여서 '숯꾸지 2021 춘계 패션!'으로 딱이다. 입은 모드는 '지리산 영하 17도'로 차려입었는데 오늘 기온은 영상 18! 아무렴 어떠냐, 동네 산길 5Km를 걸어도 누구 한 사람 안 만나는데돼지막을 지날 때 지붕을 수리하는 제3국 남정네들이 실리콘 총을 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지붕에서 무심히 내려다보는 게 오늘 패션쇼 관객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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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길에서 복숭아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아저씨는 우리가 눈여겨 보았다. 보스코는 우리 텃밭 배나무에 퇴비를 줄 때 나무 밑에 바짝 파고 주는데, 그는 가지 끝 나무지름 만큼의 넓이로 둥글게 거름을 펴서 뿌려 놓았다. 땅도 파지 않은 채로...


우리 수녀님들이 지나오다 손을 뻗어 한 알을 따먹어 보고서도 고해성사 볼 일 없을 만큼 맛이 없던그 나무들은 모조리 잘려나갔다! 우리도 그 밭의 과일을 맛보고선 서리할 생각도 없어졌건만 주인은 한길에 오가는 차를 세우고 손을 뻗어 따먹는 서리꾼들이 괘씸했는지 길가의 나무들은 다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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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따숩다 엄청 춥다를 반복하더니 올핸 꽃들도 헷갈려 정신을 못 차린다개불알꽃과 광대나물이 힘들게 잔꽃송이를 피워올렸다높은 산에는 제법 눈이 내렸는지 며칠 전보다는 강물이 좀 늘었다. 빵고신부가 인월에서 고로쇠물을 두 병 사왔기에 고로쇠 물이 나오는 계절임을 알고서 오늘 강건너 운서마을 이장네서 고로쇠물 한 말을 샀다. 작은아들이 피정을 마치고 내일 관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가방문 선물로는 약소하지만 지리산 고로쇠 첫물을 보내 그곳에 은둔하는 노인 신부님들에게 지리산 봄소식을 맛보여 드릴 생각이다. 계절이 바뀌면서 계절 따라 전해오는 자연의 선물은 어느 것도 반가울 게다.


이미예 지음 달러구트 꿈의 백화점을 읽는 중이다. 거기에 시간의 신과 세 제자 이야기가 나온다. 미래와 현재, 과거의 꿈을 나누어 시간의 신은 세 제자에게 어떤 꿈을 꾸고 싶느냐고 묻자 현명한 셋째는 자기가 사랑하는 시간을 모두가 잠든 시간으로, 과거에 대한 미련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현재의 시간으로 잡는다. 그래서 셋 째가 받은 몫은 바로 꿈속에서 사랑만 사랑만 하고 있는 현재로 엮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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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본 것을 고스란히 생시로 이뤄온 나의 젊은 날들은 이미 흘렀지만 이젠 꿈꾸지 않아도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동네 아짐들은 갈수록 걸음걸이부터 꿈속을 허우적거리며 걷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나에게도 걸음걸이와 더불어 생각도 아다지오 렌토로 느려지고 그만큼 욕심도 줄고 그만큼 행복도 소박해진다.


오랜만에 공소 미사를 드렸다. 아침에 작은아들의 미사에 참례했지만 공소 나올 교우들 숫자가 너무 적을까 저녁미사에 다시 나간 길인데 열댓 명 가량이 모였다. 코로나로 미사가 뜸해진 후 제일 많은 숫자다. 신부님은 사순절을 하느님 뜻 따라 살아감으로 부활에 이르라고, 행사가 아닌 몸으로 실제 체험한 사랑의 열매로 교회 절기를 보여주라고 당부하신다. 새로 오신 수녀님들의 소개도 있었다. 몇 해 전 운봉성당에 계시던 노인 수녀님과 90년대에 수유리에서 나한테 빵을 배웠다는 젊은 수녀님이 함양본당에 새로 오셨다.


사순제1주일 복음 '댓글'(보스코가 먼 옛날 서울주보에 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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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일주일 연례 피정을 끝내고 떠나는 아들과 최수사님과 저녁 기도와 로사리오를 바치고서 그들은 물을, 우리 부부는 음식을 한 상 차려 같은 식탁에서 먹는다. 모처럼 본가방문을 온 아들에게 단식피정을 핑계로 맛있는 것을 못 먹여 보내 아쉽다. 큰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휴천재에 와서 단식피정을 한다는 것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침묵수행을 하는 것과 진배없는 어리석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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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맞은편에 앉은 보스코의 얼굴에서 깊은 주름이 사라지고 젊었던 날의 미소가 떠오르는 듯해서 자꾸 헛웃음이 나온다넷플릭스에서 보는 미드영화 데릭에서 어느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아내에게 매일 자신을 새로 소개한다. 매일 소개 받으면서 자신을 새로 알아가는 아내에게 빠져 1365일을 지내다 보면 '그 늙은 여인의 얼굴에서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 보인다'는 주인공의 대사.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과 늘 함께 있었으니 자기로서는 최고의 인생을 산 셈 아니냐는 90세 할아버지의 고백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각, 정말 우리 황혼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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