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0일 목요일. 맑음


빵고 신부가 어제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 시트를 거두어 빨래통에 넣고 자기방 청소와 집안 청소를 한다. 안 그래도 되는데 하루라도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그냥 보기만 한다. "점심 먹고 가지. 맛있는 파스타에 빕스틱도 해줄게. 네가 좋아하는 팔미쟌 치즈 넣은 이탈리아식 시금치 요리도 준비했는데." "오후에 회의가 있어 빨리 가서 준비해야 돼요." "... ..."


[크기변환]20220210_075613.jpg


본가 방문 선물로 공동체 식구들과 나누라고 얼마 전 받아두었던 마스크94’와 양말, 어제 부산에서 친구가 보내준 어묵 박스, 엊저녁 먹고 남은 피자를 그의 차에 실어준다. 산속이라 특별한 것도 없고 겨울철이라 텃밭을 둘러 보아도 들려 보낼 게 없다. 그래도 별것 아닌 걸 받아 실어가는 게 그저 고맙다. 출가한 아들은 이제 본가가 내 집이 아니고 수도원이 내 집이다. 그래도 엄마가 있으니 일년에 한두 번 하루나 이틀 집에 들르지 엄마가 없으면 본가도 없고 고향마저 없어진다. 내게도 엄마 없는 친정이 어제 산보길에 올려다본 텅 빈 새 둥지처럼 느껴지는데...


[크기변환]20220209_145604.jpg


날비가 내린다. 눈물 그렁그렁 꽃들이 슬프다

드센 바람이 휘젓고 다니던 날

어머닌 치매로 꽃길을 지나오지 못할 강을 건너셨다

구름이 절규하며 눈물을 쏟는데

화장을 마치고 받아든 유골 상자는 봄빛처럼 환하고 따뜻하다

내 손을 빠져나가는, 유전하는 것들이여

어머니가 살았던 일생이 굵은 모래처럼 거칠다. (박동남, “초록 속에 지다”)


열흘 전은 엄마가 떠나시고 처음 맞는 설이었다. 추석은 시집에서, 설은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기에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가야 했지만 코로나라는 핑계로 그냥 지리산에 머물렀다. 나도 엄마가 없으니 지난 추석도 지난 설도 시들하고 빛이 바랬다


아들이 부모님 지향대로, 두 분이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같은 날 하느님 품으로 가시라는 미사지향을 밝히며 어제 아침미사를 드려 주었다. 보스코가 당신은 나 없이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불가능해. 당신이 없으면 나는 포말처럼 녹아서 없어질 거야.” 하는 삶의 고백을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우리 둘의 일상에서 너무 익히 보아서 너무 잘 알고 있다.


[크기변환]20220208_080958.jpg


아들이 떠난 자리는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허허롭다. 이젠 언제 또 오냐고 묻지도 않는다. 기다림은 길고 만남은 찰나이니, 보스코와 둘이서 사이좋게 사는 게 모두에게 정답이라는 걸 알고 있다. ‘빵고방의 난방을 잠그고 그가 내놓은 시트 빨래를 다 해 널고 일상으로 돌아와 책을 본다.


오늘 아침에도 앞산 언덕 위 소나무 숲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충만한 기쁨을 맛본다. 번잡하지 않아서 좋고,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라도, 언제라도 할 수 있어 편안하다. 이 평화를 무엇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 좋고, 우리가 살아온 질풍노도의 세월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크기변환]20220210_142458.jpg


오늘 점심을 먹으며 보스코에게 오후에는 남호리에 심은 나무에 퇴비를 주러 가자고 했다. 그가 순순히 따라 나서는 걸로 보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20Kg 무게의 퇴비 포대는 몇 년 전만 해도 쉽게 들어 올렸는데 이제는 힘에 부쳐 보스코와  둘이 함께 들어 밀차에 실었다


처음에는 세 포대를 싣고 내려가 나무마다 한 포 씩 내려놓았는데 점점 힘이 빠져 두 포대로 줄이고 마지막에는 한 포 씩만 실어 날랐다. 그래도 다리는 후들후들, 어깨는 늘어난 기분에 얼굴은 둘 다 해님처럼 벌겋게 익었다


[크기변환]20220210_153309.jpg


[크기변환]20220210_154659.jpg


[크기변환]20220210_162056.jpg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는 그를 잠깐 쉬게 하고 물과 간식을 먹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아직 퇴비 포대가 안 간 나무 곁에 마지막 포대를 내려 놓으니 오늘은 기운이 바닥나서 거름 주는 일은 내일 와서 하기로 했다. 호두나무 40그루, 체리나무 10그루에 포기마다 거름이 날라졌다. 엄나무 10그루엔 퇴비를 안 주려고 한다. 키가 너무 크면 엄나무 순 따기가 힘들 것 같아서. 처음은 몹시 힘이 들더니 산을 내려올 즈음에는 오히려 몸이 풀려 올여름 농사에 도전할 마음이 생긴다. 역시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능력이 있다.


[크기변환]20220210_16212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