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0일 목요일, 다시 하루 종일 비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가까운 실상사에 가서 기념법회에 참석하고 아기 부처님의 머리에 물을 부어드리는 관불의식(灌佛儀式:  옛날 인도에서는 국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정수리에 물을 뿌려 드렸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올리브유를 머리에 듬뿍 뿌렸다니까 머리에 뭘 붓기는 비슷하다)을 행하고 점심 공양이라도 얻어먹고 왔을 텐데 지리산종교연대에서 아무 공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그냥 넘기려나 하지만 좀 서운했다

(5년전 사월초파일: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282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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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는 친구들이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모전을 지나 송대 가는 길에 있는 천년송을 부처님 대신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집에서 5Km 거리. 십여 년 전 지리산 만인보를 하며 한번 갔었는데 가까운 데서 노랑 망태버섯을 본 기억이 생생한 장소다.


'정송오죽'(正松五竹: 소나무는 1월에 옮겨심고 대나무는 5월에 옮겨심는다)는 말을 나는 '5월이면 죽순 먹는다'로 알아들어 왔는데,  때마침 산청 사는 봉재 언니가 죽순을 따오신다기에 같이 산행을 하자고 권했다. 하늘은 파랗죠, 그 파랑 도화지에다 구름은 끊임없이 그림을 바꿔그려 '활동사진(活動寫眞)'을 만들죠, 길가에는 찔레꽃 꽃진 자리나 뽕나무에는 빠알간 열매가 익어가죠, 산사나무 꽃은 실바람에도 파르르 몸을 떨죠... 비록 오름으로만 이어지는 비탈길이지만 멋진 산행이었다.


오래 전 보스코가 찍은 천년송과 망태버섯 (20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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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천년송은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서서 그 넓은 팔을 벌려 나무 밑에 앉는 모두에게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지리산 골골이 짙은 녹음으로 눈부셨다. 집을 나서서 한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에 이렇게 기막힌 대자연을 마련하신 분께 감사를 드렸다. 아낙들의 살림살이 얘기에 체칠리아의 손녀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산행 후 날씨는 덥고 특별히 갈 곳도 없는 산속이라 모두 '휴천재 식당'으로 오시라 했다. 돌아오는 길, 그늘에 자라난 돌나물을 한 웅큼 따다가 초장을 뿌려 점심상에 내놓기도 했다. 봉재언니가 삶아서 가져온 죽순은 초장에 무쳐지고, 아스파라가스와도 볶아져 부처님 오신 날의 특식이 되었다. 부처님,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모두에게 함께 감사드리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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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 내내 흐리고 종일 비가 내린다. 사흘 춥고 흐리다 나흘 더운 날씬가 보다. 지리산 골짜기엔 시간도 멈춘다. 아침에 걸려있던 산허리에 구름은 벌써 흘러 산을 타고 넘었을 텐데, 지금도 산허리에 걸쳐있는 저 구름은 아깟 구름의 손주뻘일까? 가버린 것도 멈춘 것도 아닌 시간들이 작은 물방울로 저기 저대로 엉켜져 있다.


아침 일찍 서울 오빠 회사에 보낼 서류(연말정산)가 있어 읍내 우체국까지 나가서 부치고 왔다. 동생 호천이가 그 회사에 있을 때는 걔가 정리해 주었는데 퇴사를 하고 나니 당장 아쉽다. 사람은 늘 내 손을 떠났을 때야 내 손에 쥐고 있던 사물에 뒤늦은 고마움을 느낀다. 형제들이 그 존재 자체로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이런 형제들을 낳아 주신 부모님은 얼마나 더 고마운 분들인지... 어린이날 어버이날 모두 낀 5월이라서 새록새록 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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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가끔 내가 거침없이 행동하는 짓을 보며 "당신은 나 만나기 전 틀림없이 여자 일진이었을 꺼야!"라고 놀린다. 오빠는 재동국민학교 잘 다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고때 일진 행세로 안법으로 하향해야 했다. '한 주먹'하다 내려온 큰아들을 두고 '한 승질 하는' 아버지가 매타작 대신에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외였다. "바다가 깊으면 파도로 높은 법이다!" 당신도 왕년의 '배재 일진'이셨다는 소감이었을까? 아무튼 '큰아들 일진'은 지금 70대 중반을 넘어서도 짱짱하게 건설 현장을 뛰는 사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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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아들 일진'도 배재 럭비부에서 '한 말썽'했지만 내가 지금 봐도 의리 있고 정 많고 희생적이고 우리 형제 중 가장 효성스런 아들이다. '막내 일진'은 싸웠다 하면 맨날 얻어 터지고 다녀 집에만 돌아오면 '사내자슥이 맞고 다닌다!'는 죄로 두 형한테 몇 대 더 얻어맞으며 컸다. 걔는 지금 독실한 장로님이지만 환갑을 넘기고서도 이 큰누나에게는 변함없이 '귀여운 내 새끼'로, 'X만한 청춘'으로 불린다


그러니 저런 일진 삼형제 틈에서 내가 '일진 여자'로 키워진 건 당연했고 일진답게 남편을 휘두르고 일진다운 오기로 심심한 이 산속에서 억척스레 살아가는 중이다. 한국 청소년 일진들에게도 희망이 넘친다는 말이랄까?


산사나무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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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빠가 '성서방 백신 맞은 후속결과'를 물어왔다. 자기도 맞아야 하는데 아플까 봐 안 맞으려는 심사였을까? '태그끼 아재'라서 안 맞으려는 걸까은근히 의심의 눈총을 쏘았다문정부가 코로나 방역으로 K-한국이라는 명성까지 얻고 국민의 지지를 유지하자 조중동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현정부와의 전쟁'으로 둔갑시키고 안철수까지 나선 참이니까.


우리 다섯 형제가 모두 60세 이상이지만 두 남동생은 '요양원 엄마를 보러 가려면 접종증명서가 필요 할 것 같아서' 첫날에 예약을 했단다오빠도 그런데 531일(나랑 같은 날짜다)에 예약했다니 '태그끼는 태그낀데 틀딱 꼴보까지는 아니구나' 은근히 마음이 놓인다. 아닌 게 아니라 집안 식구 모두 모였을 때 누구 한 사람이 예방접종을 안 했으면 뭔가 껄끄럽지 않을까? 이렇게 서로 격려해가며 접종을 하다보면 언젠가 집단면역에 도달하지 않을까? 코로나가 독감수준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날 우리는 이 숨 막히는 마스크에서 놓여 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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