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아침.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남호리에 뿌려주려고 어제  뜯어놓았던 돌나물을 소쿠리에 담았다. 아직도 진딧물과 개미의 협공을 받는 체리나무를 소독하러 부지런히 갔다. 휴천재에서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대나무의 허리를 안고 몸살을 하는데 의외로 남호리는 양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조용히 아침을 맞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보니 아래편 고사리밭 아저씨가 아침 일찍 고사리를 꺾는데 앞치마가 허당이다. "재미 좀 보셨나요?” “어데 예. 올핸 날씨가 차서 고사리가 통 안 올라와요예년에 비해 반에 반도 못 꺾었다요.” 진이네 불루베리 밭에도 꽃이 흉년이라 전년에 반에 반도 꽃이 없단다우리 배밭이나 자두나무도 열매가 형편 없이 적으니 냉해로 올해도 과일 농사는 기대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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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우면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물고 평소에 눈에 띄지 않던 것도 하나둘 보인다. 파리는 왜 하필 천정에다 똥을 쌀까? 그러다 창문에 눈이 가자 거기 커튼이 처져 있다. 거기 그저 가만히 걸려있긴 하지만 일년에 한 번은 목욕할 권리가 있는 물건이다. '여보 커튼이 좀 더럽죠?' 그는 안다, '한 극성 하는 전순란'의 말이니 자기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커튼을 떼고, 나는 세탁기에 두세 조각씩 넣어 빨래를 하고, 오후엔 다시 핀을 끼워주면 그가 다시 사다리에 올라가 제자리에 걸어 달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그날 오후 휴천재 커튼의 연중빨래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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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가 지어진 1994년에 만들어져 그 자리에 걸렸으니 30년 이 다 돼 간다. 엄마네 지하에 세 살던 집사님이 만들어준 커튼이다. 엄마가 화전 삼거리에 사실 적이다. 논바닥에 지어진 집이라 지하실은 비가 조금만 와도 모터로 물을 퍼내야 했고 봄에서 늦가을이 되도록 모터 돌아가는 쇳소리를 들으며 지하에 사는 가족이었다. 방에서는 늘 곰팡이 냄새가 났고 옷이나 이불이라고 곰팡이가 봐주지도 않았다


이집사님은 커튼 가게를 하다가 부도가 나서 재봉틀 하나와 가난한 살림살이로 길에 나앉는 처지였는데 엄마가 그래도 들어와 살려면 살라고 공짜로 그 지하방을 내주셨다. 내가 친정 갈 적마다 지하실을 들여다보면 그 곤궁함에 가슴이 아팠으니 영화 기생충의 축축한 장면들 그대로였다. 


기술이 있고 재봉틀도 있어 그분에게 지리산 집 커튼을 부탁했는데 우리 엄마가 나한테 더 좋아하고 고마워하셨다. 얼마나 꼼꼼히 바느질을 했는지 30년이 돼 가도 실밥 하나 터지는 일이 없다. 공장 다니던 딸이 몇 해 후 방을 얻어 어둑한 지하에서 해가 잘 드는 상하방으로 이사를 갔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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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신부가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라틴어 문장에 대해 뭔가를 묻는다. 관구비서로서 공식서류를 만들고 있나 보다. 40이 넘는 중년 나이임에도 엄마인 내게는 아직도 어린 날의 빵고일 뿐이고, 외가에 가도 철없는 초딩 정도로 대접받으니 예수님도 어제 복음에서처럼, "아무리 큰 예언자라도 자기 동네에서는 안 알아 준다"며 볼멘 소릴 하실 만했겠다. 아무튼 라틴어 문장의 전문적 의미를 두고 부자가 나누는 전화를 곁에서 들으면서 마냥 흐뭇하기만 한 이 심경은 여자만의 기분일까? "여보, 내가 낳은 당신의 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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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성녀 가타리나 축일이어서 영명 축일을 맞은 황여사의 초대로 김교수 부부와 오랜만에 식사를 하고 마천 찻집에서 커피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5월 첫 주. 코로나 사태로 문정공소가 임신부님을 모시고 주일미사를 드린 게 꽤 오래전 같다. 공소 예절이면 대여섯 명이던 교우가 미사가 있다 해서 두 배 넘게 와서 신부님께 덜 미안했다. 목자가 있어야 양떼도 모여들고, 양떼도 모여야 양털도 손질해서 제 모습들을 찾는다. 미사 후 신부님네 오누이와 미루네가 올라와 함께 아침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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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손님이 오기에 오늘 함양장에 나갔다. 가는 길에 만난 부면장네 임실댁과 도정 체칠리아도 함께 갔다. 임실댁은 "동네할매들이 나이가 들수록 무작 타인에 대한 관심도 떨어져 예전의 동네 인심이 아니라."며 걱정이 크다. 다들 아픈 몸이고 거의다 혼자서 자기 몸을 돌보는 처지


임실댁과 이웃하는 제동댁만 해도, 몇 해 전까지도 그리 열심히 농사를 짓더니 요즘은 하루 일하면 하루 병원에 가서 영양제를 맞아야 버티는 처지란다. 하기야 애를 아홉 이나 낳았으니 여자 몸이 기계도 아니고 어찌 견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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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모를 내느라 온 동네가 품앗이로 서로 울력을 하는데 어느 핸가는 제동댁네 논에 모를 심고 있었지만 때가 되어도 점심을 안 가져 오더란다. 허리가 휘도록 배가 고파서야 밥을 내오는데, 다섯 번째 딸을 낳아 놓고서 밥을 해 이고나온 길이더란다. 더욱 못 잊을 장면은 그미가 신고온 고무신에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흥건히 고이고 있더란다. 여자의 신세가 그리도 서럽기만 하더라는 임실댁의 기억


제동댁은 그렇게 딸 일곱을 키우고, 여덟 번째까지 딸이라 남한테 주고 나니까 아홉 번째로는 사내애가 나오더란다. “역쉬 아들은 낳고 봐야 하는 기라!” 하며 겁나 좋아하던제동댁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임실댁의 추억담이다.


박수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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