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7일 화요일, 맑음


서울 사는 친구들에게 드룹이나 엄나무순은 안심하고 보낼 수도 있지만 제일 꼬소하고 맛있는 옻나무순은 옻을 안 타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 나도 옻은 안 타는데 몇 년 전부터 옻순을 먹으면 조금씩 가려움을 타는 게 몸의 저항력이 떨어진 듯하다. 심지어 토시와 면장갑 위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왼손으로 옻순을 삶는 데도, 그 근처에도 안 간 오른손이 10년 전 맨손으로 옻순을 데치며 쏘인 김을 기억하고 그때 그 모양으로 두드러기가 난다. 인체의 신비는 그것을 만들어주신 하느님만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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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씨가 옻순을 먹고 싶다 해서 지난 금요일에 좀 따서 보내려 나무에 다가가 보니 아직은 어린 것 같아 이틀만인 오늘 옻순을 따러 가보니 그 이틀 새에 어린 순에서 큰 나무로 자라버리고 꽃송이마저 통통 살이 올라 있다. 그제 어제 25도가 넘는 한낮 온도에 얼른 키를 키워 순을 채취하려는 인간의 손을 빠져나간 어미나무에 속았다. 내년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순이 제멋대로 커버리기 전에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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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마당의 수국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던 보스코가 그렇게나 정성껏 보살핀 수국이 올해도 병들었나 보다며 잎을 가리킨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흰가루병이 틀림없다. 아침을 먹다 말고 마당에 내려가 잎을 살펴보니 흰가루병이 아니고 송화 가루가 노랗게 앉아 있다. 차도 평상도 데크도 온통 노랗다. 앞산에 바람이라도 불면 노랑 신기루나 회오리가 바람결 따라 움직인다, 휴천재 양편, 소나무가 빽빽한 산도 이 사월을 힘들게 보내는 데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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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승질 같아서는 하루 종일 걸레를 들고 살아야 할 일이지만 산속에서 한 스무 해 살다 보면 소나무에 꽃가루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게 된다. 자연이라는, 참을성 있는 선생님 밑에서 수양을 한달까? 우리딸 순둥이가 이번에 검정 단조로 울타리를 바꿨는데 뒷산에서 날아온 송화 가루가 얼마나 뽀얗게 앉는지 걸레를 들고 산다는 소리를 듣고, ‘아직도 젊구나! 힘이 좋으니 열심히 하려므나!’ 응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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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저녁에 느티나무독서회를 한다고 한참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정리를 하려는데 코로나도 더 기승을 부리고 우리 독서회 회원이 대부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라 퇴근 후 사적 모임을 갖지 말라!’는 공문이 자꾸 와서 참석을 못하겠다고,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미루자는 문자가 떴다. 이렇게 자꾸 미루다 15년이나 이어온 독서 모임이 깨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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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글쓴이는 쓰쓰이 도모미, 그림은 요시타케 신스케가 그린 멋지다라는, 아이들 이야기다. 아이들은 유난히 잘 웃는다. 그러다 차츰 나이 들며 웃음이 줄고, 나이 들어 늙은 남자가 웃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놀랍고 근사하고 멋지다! 까진 무릎도, 블랙홀 같은 콧구멍도, 넘어져서 올려다보는 세상도, 굵은 똥도, 빡빡머리도, 앞니 빠진 갈가지도, 쓸쓸함도, 우리가 어려서 느꼈음직한 이야기가 아이들의 모습에서 다시 보인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어린이 같아야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산다는 말 같다. 이번 함양도서관 사서가 두 아이를 키우는 남자 선생이라 그가 추천해준 책 덕분에 우리 아짐들(30대부터 나 같은 70대 왕언니까지) 재교육을 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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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나절 드물댁이 쑥을 뜯어야 하는데 집근처는 약을 쳤고 동네 근처는 사람들이 죄다 뜯어가 쑥이 없다고 탄식해서 남호리 밭에 실어다 주고 쑥을 뜯으라 했다. 우리 땅을 보고선 우에 저리 땅을 놀리냐?’며 고구마도 심고 호박구뎅이도 열댓 개 파서 호박을 놓으란다. 우리 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이다. 진이엄마 말로는 고구마는 멧돼지 고라니를 부르는 소리라며 아예 생각도 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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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리 어린 체리나무에 까맣게 오르내리는 개미와 진딧물을 보고 온 터라 오늘 새벽 5시에 진딧물 약을 치러 달려갔다(‘승질대로!’). 돌아와서는 아침 먹을 시간까지 텃밭 고랑에 김을 매고, 오전에는 장에 가서(함양은 2-7 장이다) 텃밭에 심을 여름 채소 모종을 사왔다


점심을 먹고서 보스코랑 내려가 모종을 심었다. 청량고추 10포기, 보통고추 10포기, 가지 6포기, 오이는 백다대기 5포기, 가시오이 5포기, 가지 6포기, 큰토마토 5포기, 방울토마토 5포기, 곰취 모종, 대파 모종... 이 정도면 휴천재 위아래층 두 집 여름내내 먹고 남는다. 내 손으로 키운 농작물이 우리 식탁까지 올라 오는 일은 말 그대로 멋지다!’


나는 모종을 심고 보스코는 지줏대를 박아주고, 뒤이어 그는 예초기를 돌려 풀을 베고 나는 낫으로 예초기 못 돌리는 곳에 풀을 맸다. 보스코도 오전에는 사다리 둘을 이어 독일가문비나무 가지를 톱질하고, 아치의 장미를 손질하고, 뒤꼍의 오죽을 골라냈으니 딸들한테 들키면 '노친네들, 일 그만 좀 하시라구요!' 우리 부부 다 혼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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