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23일 화요일. 맑음 


스위스에 가족을 데려다 주고 일주일 만에 빵기가 어제 다시 입국했다. 회의가 있어 왔는데, 오늘 23일 자기가 기조강연을 해야 한단다. 그런데 의상을 차려 입어야 한다며 3층엘 오르내리며 연미복이랑 검정 바지 나비넥타이를 찾는다. 연미복은 보스코가 대사로 있을 때 바티칸 행사나 리셉션에 갈 때마다 입던 것으로 빵기가 입으면 팔은 짧고 배는 불룩 나오고 제비꼬리에 흰 나비넥타이를 매야 하는데, 나비넥타이가 없다. 다 저녁에 어디 가서 구하나?

생각나는 건 다이소. 그러나 다 있다는 가게에도 그건 없었다. 보스코는 문방구에 가면 애들 재롱잔치용으로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요즘 재롱잔치 시즌이 아니다. 아들 일이라면 뭐라도 돕고 싶던 그는 내 검정 리봉 머리핀을 매라고 했다가 문상용 검정넥타이를 주며 나보고 나비넥타이를 만들어 주란다. 아들이 아빠더러 참으시라며 그냥 검정 넥타이를 매겠단다. 희한한 연미복에 검정넥타이를 맨 그 모습으로 방방 뛰는 또라이가 누굴 닮았을까? 보스코는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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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성여고 다닐 때 봄소풍에서. 선생님이 '심심한데 누구 나와서 춤 좀 추라' 하시기에 교장선생님과 전교생 박수에 맞춰 트위스트를 신나게 추었다. 안성지역 교장 회의에 갔다 오신 아버지가 "니가 교장 앞에서 '조선반도 반 만한 엉덩이'를 흔들고 춤을 추었다고? 너네 교장이 '전교장 딸 대단하더라'던데 그게 사실이냐?" 물으셨다. 불호령을 각오했건만 아버지는 당신 앞에서도 한번 추어 보라 하신 다음 빙그레 웃고 넘어가셨다.


어려서야 철없어서 그랬다지만 2004한국여신학자협의회팀과 동구권을 갔을 적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떤 바에서 그들 고유한 음악을 연주하며 우리에게 춤을 추라 했다. 다들 점잖으신 여신학자들이어서 뒤로 빼고 있기에 아무도 대사 부인인 줄 모르는 곳이려니 하고서 내가 무대에 올라 격하게 춤을 추며 신나게 놀았다. 그때 함께 갔던 사람들이 지금도 만나면 나더러 춤을 춰보라지만 그건 맨 정신으로 할 일이 아닌데다 이제는 무릎 통증에 요즘 날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신세가 됐으니  전순란도 종쳤다.


나야 노는 자리에서 그랬다지만 빵기가 기조강연자로서 내게 빌려간 왕잠자리 선글러스까지 끼고서 국제회의 석상에서 강남스타일을 추는 사진을 올렸으니 내 객기가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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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을 공터에서 굴착기 소리가 종일 울린다. 구청에서 공원녹지과 직원이 내게 전화를 해서 공사장에 나온 공무원에게 제기한 구두 민원을 확인했다(그땐 태어나지도 않았을여성 공무원에게 그 공터가 만들어진 유래를 들려주고 시멘트 데크를 철거하고 비탈길을 대청소 하라고 당부했다. 산비탈에 설치된 물탱크에서 마을로 내려오던 커다란 수도관을 발견했다며 어찌할까 묻기에 철거해도 좋다고 일러주었다


지난 40년간 마을 일마다 앞장서던 만년반장전순란의 오지랖도 정작 나는 지리산에 내려가 살고 행동대원 말람씨가 세상을 떠나자 시들해졌지만 요새도 관공서를 상대할 일이 생기면 내가 집에 올라왔나 살핀 뒤 마을 아주머니들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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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고신부와 수련 동기인 조신부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장례식장이 장호원이어서 문상을 못 가고 상주와 통화로 조의를 표했다. 아버님은 작년에 위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자고 했는데, 의사는 먼저 금연을 해야 수술이 가능하다 더란다. 그러나 아버님이 너무 애연가여서 절대 못 끊겠다 해 가족이 모여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하며 병상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실 건가,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편안한 날을 보내시게 할 건가 의론 끝에 후자를 택했단다


그 뒤로 친구도 만나고 담배도 원 없이 피고 장호원 읍내에 나가 장기도 두고, 들고 싶은 음식도 드시고, 그렇게 일년 반을 지내셨는데, 다행히 마지막 통증도 심하지 않고 일주일간만 좀 아프시다 떠나셨단다.


임종은 막내아들이 지켰는데 아들을 보고 씨익~ 한번 웃어주고 가신 게 전부였단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항암치료나 수술을 안 하시고 당신이 원대로 사시다 떠나시게 한 건 잘한 선택이었어요.'라는 게 가족 전부의 의견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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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변에 이런 심각한 결정을 앞둔 지인들이 있어 나로서도 어느 게 최선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보스코와는 약속을 해두었다. 불치병이 걸려 희망이 없으면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하고 항암치료 받고 하면서 애처로운 모습 보이지 말자고, 삶의 양보다 질을 더 생각하고 남은 시간에 할 만한 좋은 일을 찾자고. 죽음이 우리 가까이에 왔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얼마나 은혜로운 시간이었나 절감하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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