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8일 목요일, 무덥고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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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광주 성요한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인을 찾아보러 가야 한다고 모처럼 어제로 날을 잡았는데, 장마비 구름이 지리산 천왕봉에 걸려 지나가질 못하고 무섭게 몸을 풀며 쏟아 낸다. 빗줄기가 어찌나 사납게 내리는지 마치 세차장에서 자동차에 비누 거품을 바르고 씻어내는 듯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 위에 세제라도 뿌리고 나오는 건데....


보스코가 지인과 몇 시간 대담을 갖는 동안 나는 휴천재 텃밭에서 따간 오이와 가지를 가까운 본당 수녀원에 갖다 드렸더니 수녀님도 당신이 선물받았다며 먹음직한 복숭아를 한 보따리 내주었다. 광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창원마을에 들러 김석봉 선생의 책을 좀 샀다. 가난한 귀농인, 끈질긴 환경운동가를 돕는 길은 책 몇 권이라도 사서 나누어 읽히는 길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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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산청에서 미루네랑 고기를 먹다 혀를 얼마나 세게 씹었는지 혀끝 전체가 욱신거린다. 보스코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며 혀가 아파 운전을 못하겠다했더니, ‘앞으론 자주 고기를 사줄 테니 혀는 씹어먹지 말라며 기어이 광주를 갔다오자고 우긴다. 매일 푸성귀만 먹다가 괴기를 먹으니 내 이빨이 남의 괴긴지 내 괴긴지구분을 못하나 보다. 사실 숨은그림은 폭우가 너무 심해서 운전하기 싫다는 말인데 한국의 남자 사람들에게는 여자 사람들의 말을 풀어서 들려주는 여의도 번역기가 필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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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리 동네 최고의 관심 사람’[관종]으로 등극한 유영감이다. 그의 기행은 갈수록 다양하고 심각해지는데, 이래저래 그분에게 당한 동네 아짐들은 '늙어서 오는 고약한 병인기라 고칠 수 없으니 우짜노!'라고 보아 넘기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한남댁이 비료푸대에 심어놓은 우엉잎을 모조리 낫으로 쳐버리고, 상주댁이 전화지주에 올려 탐스럽게 꽃이 피던 서양인동 덩쿨도 쳐버리고, 한동댁네 호박덩쿨은 흔적없이 잘라버렸다. 지나가다 당신 눈에 들어 우리 화단 꽃을 캐다 당신 꽃밭에 심는건 애교로 봐줘 왔다.


어제 광주에서 돌아온 길에 우리 길가 화단을 보니 한창 곱던 루드베키아가 안 보인다역시 범인은 딱 하나유영감님 꽃밭에 가 보니 막 뽑혀와 추레하게 모가지가 꺾인 채 거기 심겨져 있다. ‘왜 남의 꽃을 뽑아 왔냐?’니까 꽃이 거기 있어서.’라고 우물거린다. 책도둑도 그렇지만 꽃도둑도 도둑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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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드디어 내 인내심의 임계점을 넘기고 말았다. 대모님이 보내주신 독일 해바라기씨앗을 포트에 심어 싹을 틔우고 두어 번 화분을 옮기며 키워 길가 꽃밭에 심었는데... 이삼일 후면 필 해바라기 세 포기를 낫으로 모질게 잘라버렸다


우리 밭을 지나 자기 논에 물 대는데 거추장스럽다고 우리 텃밭의 감자 줄기를 뽑아내고 옥수수를 잘라도 말을 않고 참았는데 까닭 없이 잘려나간 해바라기를 보고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뿌리를 흙이 잔뜩 묻은 채로 뽑아들고 내려갔다.


큰소리를 질러 영감님을 불러내고, 그집 돌층계에 해바라기 뿌리 흙을 탁탁 털어내며 따졌다. “아저씨, 왜 해바라기는 낫으로 목을 뎅강 잘랐어요?” “내가 안했어,” “동네 아짐들이 아저씨가 했다는데요?” “했다고 했으면 했나보지. 그런데 몰라. 기억이 안나.” 


나는 목청을 돋우어 그동안 영감님이 저지른 '만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한번만 더 이런 짓 하면 아저씨네 꽃도 모두 모가지를 분지르고 뽑아 버릴 꺼예요.” 내 기세에 눌려 풀이 죽은 아저씨는 그래, 마음대로 해.” 란다. “다시 한번 동네 꽃이나 남새에 나쁜짓 하면 아저씨네 논에 가서 동네 아짐들이 벼를 싹 뽑아 버릴꺼예요.” “그래? 그렇게 해. 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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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몰라서 모르는지 조금은 생각이 나는데 모르는 척하는 건지... 동네 아짐들이 나무라면 유영감이 되레 더 큰소리로 제압하여 아짐들은 뒤에서만 쑤근거리는데, 이 젊은 서울여자가 방방 뛰는 큰소리의 기세에 눌려 순하디순한 어조로 수긍을 해가니 한편 측은하기도 했다.


비가 와서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동네 사람이 내 목청에 무슨 일인가?’ 몰려들어 교숫댁 성깔을 봤으면 쪽팔려서 이사라도 가야 했을지 모른다. ‘저 영감 잘됐다. 임자 만났다고 속시원해하는 아짐들도 있었음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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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행된 새 운전면허증(핸폰과 더불어 사라진)을 찾으러 읍내에 가는 길, 영감님집 층계, 내가 흙범벅을 해놓은 계단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어쩌면 내가 소락데기를 지르며 난리쳤던일도 까맣게 머리에서 지워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머잖은 나의 장래는 아닐지 누가 알랴?


읍내에 사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고, 집안이 온통 냄새나더라고 전화를 했더니만 자기도 걱정이 크다며 "그래도 저렇게라도 움직거리는 게 양로원에 갇혀 계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하며 긴 통화로 탄식을 한다. 나도 100세 엄마를 3년 요양병원 생활을 거쳐 여읜 처지라 그를 위로하며 다독여주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는데, 노인 하나의 마지막을 돌보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래도 원성과 항의로 노인을 기어이 요양병원으로 보내버리게 하지 않고 '늙으면 생기는 고약한 병'으로 치면서 이러저러한 행패를 견뎌내는 시골 인심이어서 한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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