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4일 목요일, 흐림


오랫동안 놀다가 농사일로 몸을 움직이는 게 그리 녹녹치는 않다두 주간 집을 비운 뒤 그제 감자를 캐고 어제 텃밭 지심을 매고 나니까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모처럼 나아가던 관절염 앓던손가락이 도로 아프기 시작한다. 정형외과 의사는 나으려면 안 쓰는 길밖에 없다는데 내 귀에는 '배고파? 돈 있으면 빵 사먹어!’ 정도로 들린다. 오늘 하루쯤 쉬어야겠다 작심했지만 한 자 넘게 커버린 풀들이 마악 꽃을 피우려는 참이다. 그걸 그대로 두어서는 텃밭은 호랑이가 새끼 칠정글이 된다. 지금이야 잡초 한 포기지만 다음엔 수십 수백 포기를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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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코를 골면서 잠든 보스코에게 지청구를 안 들으려 살살 일어나 살살 계단을 빠져나와 밭으로 갔다. 세 시간 반 동안 낫을 휘둘러 천하를 평정하고 허리를 펴고 일어서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가을 김장거리 심을 때까지 부직포를 덮자니까, 보스코 말이, 그렇게 덮으면 흙속의 미생물이 죽을까 봐 안 된다나? 그리고 잡초는 그 뿌리로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나?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간 당신 아내를 잡을 것이니 아내와 미물 중 누구를 살릴 것인가 잘 생각해서 택일하시라!"고 경고했다. 그가 제일 무서워하는 경고다.


텃밭 축대 밑에 심은 호박들이 줄기를 힘차게 뻗기에 대나무 다섯 개를 잘라다 호박이 줄기를 감고 오르라고 지주를 해 놓았는데 잔가지만 남고 기둥이 없다! 직감에 누군지 알 듯하다! 때마침 유영감님이 올라 오는데 짚고 있는 대나무 지팡이가 눈에 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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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누가 우리 호박 지주로 심은 대나무를 싹 가져가 버렸는데 혹시 아세요?" 대뜸 당신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아니 몰라!" "아저씨 지팡이가 그건데?" "이것은 내끼라. 집에서 가져왔어." "우리 껀 전순란이라고 이름이 쓰여 있는데요." 영감님은 순진하게도 당신 지팡이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이름 없고마. 내끼라!" 당신 논가에 물호스를 붙잡아 괴어 놓은 대나무 역시 눈에 익은 것이어서 쿡쿡 웃음이 나오지만 동네 남의 집 무덤가에 자손들이 갖다 꽂은 조화(造花)도 가져다 당신 집 층계에 화분을 놓고 심어두는 분이니 더는 할 말이 없다.


내 것 남 것 구별도 힘든 나이가 되셨구나 싶고 저렇게 점점 아이로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오늘 아침에도 임실로 떠나면서 당신 논으로 올라오는 영감님과 마주쳤다. 기력이 탈진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어서 차창을 내리고 큰소리로 "영감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누군지 알아보겠다는 표정으로 피어난다. "아저씨! 기운 차리세요!"하며 손바닥으로 키스를 날려 보냈더니만 껄껄 웃으면서 더없이 얼굴이 밝아진다. '외간여자'(?)한테서 날아온 손키스를 생전 처음 받아본 노인의 놀라고도 밝은 표정에 나와 보스코는 길을 내려가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지난달 임실 읍내에 새집을 마련하여 집을 고치고 집들이를 한다는 문섐의 초대를 받아 임실로 떠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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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성당에서 김원장님과 문섐을 만나 임실 문화재라는 그곳 성당을 둘러보았다. 돌로 지어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종탑이 인상적이다. 주변에 꽃밭과 잔디밭에 물을 주는 영감님이 있어 인사를 했더니 본당 총회장님이란다. '이곳 신부님은 복이 많으시구나. 총회장이 나서서 꽃밭에 물을 주니...' 


성당 내부도 정갈하게 고쳤고 제단에도 새로 프레스코벽화로 장식을 새로 하였다제대 중앙 그림이 성모자상인데 초딩 만큼 자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여인이 나이 들어 보여 "예수님 외할머니 성녀 안난가 봐." 하던 보스코가 그 여인 옆에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새겨진 그리스어 약자를 읽고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전세계 어디서나 성모 마리아는 어려보일 만큼 젊디 젊게 그리기 마련인데 임실 성모님은 성당에 주로 나오는 할매들을 모델로 맞추어 친숙한 얼굴로 그린 듯하다. 보스코는 또 "예수님한테도 코로나 마스크를 씌웠나?"라며 남의 그림을 또 흉보았고 김원장님은 "화가가 예수님 인중(人中)을 강조한 것 같아요. 인중이 길어야 오래 사니까." 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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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님 부부는 우리를 섬진강 상류 오원천 기슭에 조성된 '사선대(四仙臺)'로 데려가 아름답게 꾸민 널따란 공원을 구경시켜 주고 메기 매운탕을 대접해 주었다. 진안 마이산의 두 신선과 임실 운수산의 두 신선이 어울려 노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네 선녀가 이곳 경치가 너무 좋아 땅으로 내려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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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마련한 문섐 아파트는 작지만 아내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수리한 김원장님의 아내 사랑이 곳곳에 배어있는 정성스런 공간이었다. 김원장님 부모님이 사시는 마을집에 가니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우릴 반가이 맞아주셨다


김원장님 농장의 감자 농사는 꽝이었지만 마늘 농사는 짭짤하여 우리는 제일 굵고 좋은 것으로 한 접이나 선물받았고 쌍계사 사진 액자도, (어머님이 내게 주시는화장품 세트도 선물받았다지리산에 내려와 살면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선물은 가까이서 늘 마음으로 통하는 벗들을 쉬이 만날 수 있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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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無盡藏) 산이 많은 무진장(茂鎭長: 무주군茂朱郡, 진안군鎭安郡, 장수군長水郡을 통틀어 부르는 지명)의 어둑한 길을 달려 휴천재로 돌아오는 길. 엊그젠 종일 천둥 번개에 심지어 우박까지 쏟아지더니 오늘 저녁엔 차창을 때려 부술 듯 소나기가 온다.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 겹겹이 솟아 고스란히 온몸으로 비를 받아들이는 산산산의 병풍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앞서 보이고 있다. 어쩌다 우리 둘 다 핸드폰을 잊고 나간 외출이었는데 보스코의 폰은 그의 책상 위에서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길이 없어 당분간 지인들과 소통에 문제가 있겠다. '어디다 뒀다 잃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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