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15일 화요일, 비온 뒤 맑음


두어 달 만에 찾아온 서울집은 밀림의 왕국이었다. 주인이 비운 집은 엄마 없는 아이 같다. 6대 집사 레아는 대문을 열고 풀이 우거진 길을 들어서면 비밀의 정원에 사는 여주인공 같아 서울 시내에서 이런 삶이 가능한가?’ 하며 행복했다지만 자기가 풀인지 꽃인지 인지능력을 잃고 함부로 커버린 풀들을 골라서 뽑아낼 재간이 없었단다.


그래서 12일 토요일에는 마당을 손질하고 큰취는 잘라내서 순을 따 나물로 챙기고 나머지 꽃과 나무들은 제 모양을 잡아주었다. 보스코가 턱없이 커버린 잔디를 깎고 양그레고리오 선생님이 선물하셨던 분홍 넝쿨 장미를 손질하고 나니, 정원도 막 이발하고 나온 새신랑이 되었다.


크기변환_20210615_172352.jpg


우리가 40년 살아온 동네가 내년이면 '공공주도 3080 대도시권 주택 공급 예정지'로 지정되어 흔적 없이 사라질 정원, 우리의 첫 번 집이자 마지막 집으로 여기고 살아온 43년 세월도 함께 사라진다니 참 서운하다.


당신 100년 생애 마지막 20년을 살아오신 미리내 유무상통에서 임종하신 엄마를 그곳 유해봉안소 하늘문에 모시고서, 설립자 방상복 신부님이 유무상통 노인들에게 가훈(家訓)으로 커다랗게 새겨두셨던 '놓아라!'를 되뇌이며 내가 비록 엄마 나이만큼 살더라도 앞으로 30년이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야 할 터인데 서울집의 소멸도 조금 일찍 당겨진 이별이라고 위안해야겠다.


크기변환_20210612_105518.jpg


13일 주일에는 미리내로 삼우제를 갔다. 유무상통 성당에 삼우제 연미사를 신청해둔 터라 1120분에 우리 부부가 온가족을 대표해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지난 20여년을 두고 한 달에 한번씩 찾아다니며 낯이 익었던 어르신들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손을 잡아주며 위로해 주신다. '우리도 곧 떠나요. 당신도, 우리도 영원한 건 없어요'라는 눈인사였다.


크기변환_IMG_20210613_112300.jpg

작은손주 시우가 제네바 동네성당에서 미사복사를 시작했다 

크기변환_1623665507600.jpg


12시에는 다섯 형제와 조카들이 유무상통 하늘문에 들어가 엄마의 유골이 봉안된 서랍에 임시 사진을 붙이고 우리 막내 전호연 장로의 안내로 삼우 예배를 바쳤다. 큰사위 보스코의 기도, 전장로의 설교, 큰아들의 감사말씀으로 예배를 바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난 해 요양병원에 계시던 엄마는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그토록이나 만나뵙기 어려웠는데, 육체를 떠난 엄마는 이제 어디서나 쉽게 만나뵐 수 있어 저 세상 가셔서 우리와 더 가까워지신 엄마라고 느껴졌다.


크기변환_20210613_121934.jpg


크기변환_20210613_122445.jpg


백세를 누리셨지만 의식을 잃고 요양원에서 연명하시던 엄마를 보면서 죽음이란 선물이에요. 죽음이 삶을 고마워하게 만들거든요.”하던 말에 실감났다. 인간이기에 불사불멸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영원을 바라보는 희망을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며 유무상통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유무상통 설립자 은퇴사제 방상복 신부님에게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에게도 잘해드렸지만 우리 부부의 방문에는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다. 


크기변환_20210613_122650.jpg


크기변환_20210613_123407.jpg


(1) 울 엄마의 처녀시절


엄마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지만 외할아버지가 공직에 계셔 서울에서 자라면서 공부를 하셨다. 태어났을 때 워낙 체소하고 허약하여 1922년에 태어났는데도 2년 늦게 1924년생으로 호적에도 올랐다. 국민학교도 너무 허약하다고 하여 2년 늦게 취학한 탓에 동생 선옥이이모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 뒤 이화여전에 가서도 몸이 허약하여 외할아버지가 운동을 하도록 배려하셔서 농구를 시작했고 키는 크지 않았지만 얼마나 날렵하게 공을 놀리는지 반바지에 다리를 내놓고 뛰는 처녀 구경’도 겸해서 이웃 남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화농구 넘버6 조정옥'이 상한가를 쳤단다. 엄마는 조선농구 대표단에 발탁되어 북경과 일본에도 원정 경기를 다니기도 했다. 같은 시절에 이모는 정구를 했고 엄마는 농구를 했으니 당대로서는 신여성(新女性)이었던 셈.


이전 시절 열일곱살 엄마 사진 

크기변환_20210613_121714.jpg


우리 외할아버지 조용대 검사가 철원으로 발령가자 이전(李專) 가정과를 마친 우리 엄마는 철원 동순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큰딸은 요조숙녀로서 직장생활보다는 시집갈 준비를 해야 한다며 서울로 불러들였고, 철원의 그 교사 자리엔 같은 이화여전을 나온 동생 조선옥을 근무시켰단다.


크기변환_20210612_082612.jpg


외할아버지가 서울로 이임하여 판사로 근무하시던 무렵. ‘일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평강 부호의 아들 전문규(全文奎)가 서울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후에 인천시장을 한) 황모씨가 조판사에게 '평강 부호의 아들로 니혼대 법대를 나오고 고시공부를 하는 청년'이라며 전문규를 조판사에게 사윗감으로 소개하였다. 조판사가 황모씨가 있는 자리로 전문규를 불러 첫 대면을 가졌는데 구변 좋은 젊은이에다 배재중학교 후배라는 점이 맘에 들어 선을 보이기로 하고 가회동 자택으로 불렀단다.


엄마의 회상으로는, 남자가 자기와 선보러 온다는 소식에 가슴을 조이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모친이 "선보러 온 남잔가 보다"라며 버선발로 나가기에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웬 걸, "웬 중학교 1학년쯤 될까 하는 아가 들어서는데(황해도 여자 조정옥의 말씨 그대로) 머린 빡빡 백두를 치고 일본식 반바지에 군복 같은 윗도리를 입은 복장에 가슴이 철렁했다." 당장 '저런 남자한텐 시집 안 간다!'하고 가슴에 가위표를 쳤다는데.... [계속]


엄마 아빠의 약혼사진(1944)

크기변환_20190705_23093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