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일 목요일 대체로 맑음 저녁 늦게 비

 

어제 오후에 산행을 다녀와 피곤해서 미처 일기를 못 썼으니 오늘 몫으로 미뤄 써야겠다.

 

지난 주일에 본당 수녀님과 백운대를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어제 오후 2시에 전화연락이 수녀님에게서 왔다. 우리가 삼각산 발치로 이사온 것이 1978년이니까 30년이 넘어 사는데 그 동안에 내가 백운대에 오른 것은 딱 한번이었다. 1987년이었나? 날마다 바라보면서 사는 산이라, "삼각산이 어디 가랴?" 하는 심경이었나 보다.

 

하여튼 어제 오후 2시에 출발하여 6시 반에 도선사에 돌아오는, 역사적인 두번째  백운대 등반을 하였다. 우이 성당 마리아 수녀님, 마리로사 수녀님, 보스코와 나 넷이서. 그것도 점심 후에 산보삼아서 말이다.

 

도선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수녀님이 앞에 타고 계셔서 관리인의 가타부타 시비가 없었다.) 절뒤로 돌아서 용암문으로 올라갔다. 두 분 수녀님도 잘 걸었고 보스코도 비록 운동화 차림이었지만 군소리가 없었다. 용암문에서 노적봉까지는 무난한 산길이었으나 노적봉에서 위문까지는 미끄러운 바위에 쇠기둥과 쇠사슬을 엮어 놓은 제법 험난한 코스였는데 마리아 수녀님이 용감하게 잘도 돌파하였다. 마리로사 수녀님은 젊은 데다가 수녀원에 오기 전에 워낙 산행을 즐겼다는 말대로 조금도 지친 내색이 없었다. 우이성당에 온지 두 해가 지나도록 백운대 가자는 교우가 없어서 마음만 졸였는데 소원을 풀어서 기분이 좋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우리도 덩달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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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줄과 사다리를 타고 씩씩거리면서 백운대에 오르니 고도가 837미터. 문정리 등산대를 열심히 따라다닌 보람으로 "이 정도는 껌이지?"라는 속말이 나왔으나 발설은 하지 않았다. 산에 가면 겸손하라는 말이 있어서... 날씨가 맑아 한강도 잘 보였고 덕성여대 뒷산에 손톱만하게 내려다 보이는 우리집이며 근방의 우이성당의 하얀 지붕이며 예수성심상이 신기하기도 했다.  

 

맞은편 인수봉에는 개미만한 록클라임버들이 모험을 즐기고 있었다. 보스코가 서재에서 간간이 망원경으로 인수봉을 관찰하면서 "오늘은 개미가 몇 마리쯤 달라 붙었네." 하던 생각이 났다.

우리가 우이동에 집을 산 유일한 동기는 삼각산(북한산)이 있어서였고, 보스코의 이층서재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는 삼각산이 한 폭 그림으로 보였다. 빌어먹을 연립주택들이 산을 훔쳐가 버리기 전까지는... 그 일로 지지고 볶던 서울을 떠나서 지리산 자락에 살게 된 사실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로 새삼 느껴졌다.

 

산꼭대기 벼랑에서 간식을 하고 하루재를 거쳐서 내려오니 길이 험하기는 노고단에서 화엄사 가는 길과 어섯비슷하였다. 도선사 주차장에 내려오니 저녁 6시 반. 다시 차를 타고 내려오다 고향산천을 지나치면서 옛날 생각을 했다. 할렐루야 기도원이 소귀천 계곡으로 오르는 이 곳 등산로를 폐쇄하여 보스코와 내가 반년간을 투쟁하여 등산로를 다시 열게 하던 일이다. 벌써 10여년전이다. 추운 겨울에 성당마다 찾아가서 주일미사 오는 교우들에게 하루 종일 등산로 폐쇄 규탄 서명을 받던 일이며, 할렐루야 식구들의 폭행과 협박이며, 형사들의 으름짱이며, 신문사들의 지원보도며, 김형태 변호사와 제일법무의 모든 변호사들이 연대하여 법률적 지원을 해 준 일이 떠오른다.

 

계곡 초입에 있는 오리장작구이집 "산수유"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두 분 수녀님도 맛있어 하셨다. 주인 전사장님은 우리와 30년 가까운 지기 사이로, 실컷 먹고 나오는 우리에게 저녁값을 무료로 처리해 주었다. 10여년전 모친상을 당하여 혜화동 묘지의 부친 묘소에 합장을 하려다가 어려움이 있었는데 보스코가 도움을 주었다는, 우리도 잊어버린 옛 얘기가 나왔다. 이 집의 장작구이 오리고기맛은 일품이다.

 

오늘 10월 초하루에는 아침 일찍 대림동 수도원으로 가서 빵고를 데리고 지리산으로 출발하였다. 아침 8시에 수도원에 도착하니 젊은 회원들이 모두 원장신부님에게 외출신고를 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기쁨에 모든 수사들의 얼굴이 더없이 밝고 환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도 그렇겠지. 운전을 아들이 하니까 그렇게 편하고 마음이 뿌듯할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를 피해서 송탄까지는 국도(1)로 달렸고 거기서부터 고속도로에 오르니까 막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