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0일


어제(8월 19일) 저녁 뒷집 초청으로 수동 메기매운탕집을 향해 한참 달려가는 중인데 핸드폰이 울렸다. 보스코였는데 헤드빅 수녀님이 쓰러지셨다면서 공소회장님을 급히 찾는 전화였다. 수녀님으로부터 위급한 전화를 받은 듯했다. 보스코라도 집에 남아 있어서 수녀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토마스 회장은 우리를 차도에 내려 뒷 차가 싣고 가게 하고서 자기는 당장 차를 돌렸다. 우선 앰블런스를 부르고 자기는 문정으로 내달렸다.

 

보스코의  말에 의하면 30여분이 지나서 도착한(마천에서 왔다고 함) 앰블런스에 산소 호흡기가 없어서 그냥 모시고 갔으며 토마수2가 앰블런스에 동승하고 정토마스 회장이 자기차로 앞장서서 에스코트하여 함양으로 떠났다. 보스코는 가밀라 아줌마에게 할머니(강회장 모친)에게 알려서 공소와 수녀님댁 문단속을 하도록 부탁하고 올라왔고, 만일의 경우 수녀님의 독일 친척들에게 연락할 준비를 하였다.

 

그 동안 무슨 조처가 있었는지 우리가 함양 한마음병원에 들렀을 적에는 침대 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백짓장 얼굴로 수심에 가득찬 70대 노파가 앉아 있었다. 자꾸만 토기가 올라와 눕지를 못하였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쪽배를 타고 커다란 파도와 씨름하다 지친 뱃사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절망과 고독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선교사로 한 평생을 보낸 분의 곤핍한 표정이었다.

 

재마스님이 우선 수녀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따서 피가 통하게 해드렸다. 그제서야 수녀님도 혈색이 돌고 안도가 되는 표정이었다. "수녀님, 우리가 곁에 있으니 안심 하세요! " 위안을 드리면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한마음 병원에서는 검사장비가 없다고 하여 정회장 부탁으로 프란체스코씨가 도정에서 짚차를 몰고 내려와서 수녀님을 모시고 진주로 떠났다. 정회장 부부는 공소 회장으로서 진주로 함께 갔다. 우리는 수녀님을 동반하여 문정에서 함양까지 와 있던 토마스2씨와 함께 문정으로 돌아왔다. 10시경 강회장 동생 요한이 전화를 해서 사정을 묻길래 진주에 실려가셨다고 알려주었다.

 

오늘 새벽에 막달레나씨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밤새 주요 검사를 실시했는데 뇌에서 이상이 발생한 것은 아니란다. 아침에 의사가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경과에 따라 퇴원도 가능할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

 

정회장 부부는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한 것 같았다. 더구나 응급실에서 스물 여섯의 젊은이가 대우조선에서 일하다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여 (다른 두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새벽 네 시에 숨지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니까... 곁에는 임신한 그의 젊은 아내가 몸부림치고....

 

정회장은 대전에 볼 일이 있어 아침으로 병원에서 돌아오고 내가 체칠리아씨와 함께 병원으로 가서 막달레나씨와 함께 병상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아침 열시 체칠리아씨가 내려와  내 차로  함께 진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