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월 31일 함양날씨 하루종일 구름, 저녁에는 걷힘

 

사랑하는 에스텔 수녀에게

 

삼각산이 바라보이는 서울집의 창가로 수세미가 기운차게 매달려 올라가네. 삼층 다락방의 창문도 머지 않아서 넘볼 것 같네. 한 때는 온 가족의 음성이 이 방안에 가득했는데 ... 어느 날엔가는 나 혼자 저 산봉우리를 비추는 아침 햇빛을 이 창가에서 내다보고 져가는 황혼의 삼각산 노을을 혼자서 맞이하리라는 생각이 든다네.

 

오늘은 친구의 남편이 퇴직을 해서 퇴임식에 참석하느라 함양에서 서울로 버스 여행을 했다네. 속썩이든 학부모들도, 엄격했던 교장과 교감도, 살갑던 여선생도 다 지나간 시간에 묻고 졍년을 앞당겨 학교를 떠났지. 뇌졸중으로 쓸어져 수년간 투병을 했으나 인지능력이나 언어구사능력이  아이같아진 남편을 보면서, 그나마 인간관계 마저 낯가리고 아이처럼 되어 버린 남편을 두고 가슴저려 하는 친구가 무척이나 안타까웠다네. 그러면서도 친지들과 하객들 앞에서 평소의 여장부답게 씩씩한 친구의 모습은 더욱 애잔해 보였지. 잔치집 같이 어수선 한데도 축제는 없었어. 어째설까? 어째설까?

 

자네 숙모인 나는 내 가까운 이들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네. 그리고 그런 날도, 그 모든 날이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 않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네. 또 그렇게 되도록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첫허원식에 조카님의 기도도 그러했겠지? 틀림없어. 거기에 내 기도도 보탰으니까. 거룩한 제단 가까이서 조용히 시들어 가는 꽃처럼, 에스텔 수녀도 세상의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주님의 품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을 테니까 말일세. 아무쪼록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녀회 안에서 죽을 수 있도록 자네의 결단이 굳굳하기를 빌었네.

 

자네가 우리에게 준 선물 고맙네. 삼춘은 부채와 거기 쓰인 글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시더군. 내게 준 자그마한 퀼트 지갑도 내 맘에 쏙 드네. 오늘 아침 서울 올라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려서 자네가 손수 짠 장백의 띠를 빵고 부제에게 보냈다네. 정성껏 떠준 누님 수녀의 뜻대로 허리를 질끈 동이고 머나먼 길을 부지런하고 착하고 겸손하고 기도하는 사제로 걸어갔으면 하는 것이 어미된 마음이라네. 

 

얼마 전 큰 올케한테서 퀼트 천조각들을 선물받았다네. 그런데 이제 눈도 잘 보이지 않고 쪼그리고 앉자니 무릎도 성하지 않고 쉬운 일만 우선 눈에 보이고 해서 자네에게 선물로 보내네. 자네의 수녀원 특기가 바느질이라니 이 조각들이 자네 손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리라고 믿고.... 그래서 자네한테 우편으로 떠나는 천조각들이 행복해 보이기도 하네 그려.

 

사랑하는 에스텔 수녀,

자네는 정말 좋은 몫을 택하였네. 또 더없이 좋은 분을 마음의 배필로 삼았네. 크나큰 인내와 겸양이 필요한 길이겠지만 지난 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하고 덕스럽게 이겨나가리라 믿네. 이 숙모의 기도가 항상 자네 뒤에 있음을 생각하고, 우리 부부와 특히 빵고 부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 부탁하네.

 

건강 조심하기를!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마더 데레사가 수녀 지원자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네.

"잘 먹고 잘 잘 것."

 

2009.8.31

숙모 전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