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2일 일요일,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음

 

오후에 반가운 친구가 온다고 해서, 문정공소에서 저녁 미사가 있지만 함양읍에 나가서 10시반 미사에 참례했다. 수녀님도 신부님도 오늘 공소에 가는 날인데 웬 본당미사냐고 물으신다.

 

점심은 김밥집에서 "불량식품"(보스코가 붙인 이름)으로 먹었다. 김밥, 오뎅, 졸면, 라떢볶이 1인분에 5천원씩인데 얼마나 양이 많던지 다음부터는 1인분 시켜야겠다. 함양 메인스트리트에는 김밥집이 열 개는 된다. 김밥은 못 먹고 1인분을 더 시켜서 싸들고 오는데 장효익씨네 들르게 되어 그 집 꼬마들에게 주었다. 1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애들이 좋아했다.

 

안동으로 이사간 곳에 창고가 아직 마련되지 않아서 두세 달은 지리산 집을 더 써야겠단다. 그래서 부인이 대강이라도 짐을 정리하는 중인데 가히 집시 살림 수준이다. 판자로 옆을 막은 캠핑카를 끌고서 고속도로로 달려가면 지나가는 사람들 눈이 모두 휘둥그래진단다. 로마에서 본 집시(그곳에서는 Zingari 징가리 라고 부른다.) 차량의 모습 그대로다. 기왕이면 차에다 빨래줄도 묶어서 빨래를 휘날리고 달리면 더 멋있겠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그만한 모험도 감행할 수 있다니 둘의 나이와 용단이 부럽다.

 

80년대초 로마의 가난한 유학시절, 시칠리섬으로 15일간 여행을 갔다. 피앗127(700cc로 마티스 크기다.)에 어른 넷, 아이 둘이 타고 차지붕에는 걸게를 하여 아이스박스, 식탁, 가스통을 싣고 자동차 유리문에는 빨래를 걸고 신나게 달렸다. 명승지 고도에 도착하면 교외로 나가서 시골 허술한 여관에 짐을 풀고 도회지로 나가서 구경하였다. 밥은 한 끼도 사먹지 못했다. 여관에 돌아와서 밥과 김치, 라면으로 해결했다. 우리가 떠나고나면 여관주인은 김치냄새(도시가스 냄새가 난단다.) 빼느라고 많이 투둘거렸을 게다. 그곳 문화를 알려면 반드시 음식을 먹어 보아야 한다는 남정네들에게 메뉴만 실컷 보여주고 커피 한 잔도 사주지 않았다. 커피 끓이는 기계마저 가져갔으니까.... 

 

그래도 마냥 즐거웠고 행복했는데....  희랍신전 돌무더기 위에서 뛰놀던 우리 아이들은 자라서 우리 곁을 멀리 떠나가 있고, 그 가난한 여행을 함께 하면서 즐거웠던 요한씨와 리타씨도 서로 헤어져 따로 사는 바람에 먼 옛날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과 리타씨와는 거리로만 멀지만, 이혼하여 내 친구 버리고 새 여자와 아이낳고 사는 요한씨와는 마음으로도 멀어져 버렸다.

 

오후에 이장님이 부인과 무우를 캐고 있었다. 염치불구하고 찾아가 "이장님, 무우 캐시네요?" 라는 인사로 한 아름 얻아왔다. 다시 내려가서 "제게 주신 게 열 다섯 개밖에 안되는 걸요." 라는 말로 "아이고, 그럼 더 가져 가세요." 라는 답을 유도해내어 다시 한 아름 얻어오니 설흔 개가 넘는다. 보스코가 내 얘기를 듣고 나의 몰염치에 늘 그렇듯이 장탄식을 하였다. 이장님 부인도 혀를 끌끌 찼을 게다.

 

DSC08604.jpg  DSC08603.jpg  

 

오늘 오후에 또다른 이혼녀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함께 온 지금 남편과 새 살림 한 게 10년이 넘는다. 우이동 옆집에 살던 그니는 강력계 형사인 남편의 폭력과 무지막지한 욕설과 여성비하의 행동을 견디고 있었는데 곁에서 보는 나도 참기 힘들었다. 친구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갈라서기로 하였고, 재산분할청구를 해서 17평짜리 아파트도 마련하였다. 그때부터 친구에게는 날개가 돋기 시작하였고 자기의 숨어 있던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다. "교차로"에서 인정받는 직원으로 일하다, 재혼하여 영화계에 발이 넓은 남자를 만나서 어린이 탈렌트 아카데미를 만들어 여성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그니의 능력과 수완, 추진력과 기민함은 누구도 못 따라갈 것이다.

 

전남편의 세 아이는 배신감으로 엄마를 무척이나 박대하고 멀리하더니 지금은 모두 엄마의 그늘에 와서 직장을 갖고 살아가는 처지로 바뀌었다. 빵기와 동갑인 아들에게 차 빼주고 집사주고 장가들이고 엄마 회사의 총무를 맡기고 딸들은 엄마와 함께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다. 남편과 더불어 남양주에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남편을 떠밀어 대학원을 수료케 하고 드디어 남편의 꿈이던 영화 제작을 재정지원하고 있다. 그의 영화도 "워낭 소리"만큼 대박이 나서 장감독이 훨훨 날아오르면 좋겠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니까 그 아이들도 새 아버지를 인정하고 아들과는 고달픈 인생도 함께 의논하는 것 같다.

 

DSC08608.jpg   DSC08612.jpg

 

내 친구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내고 사업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이혼을 앞두고 내린 용감한 결단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리고 앞을 보고 전력투구하여 오늘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니에게 끝없이 박수를 보낸다.

 

앞서 말한 친구 리타씨는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고 헤어졌지만 목포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을 돕는 교육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좀 쓸쓸하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과거의 상처를 딛고 꿋|꿋하게 일어서는 모습에 깊은 존경이 간다.

 

To be or not to be?

과연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감히 단언해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미 파경에 간 마당에는 이혼의 결단이  더 낫지 않을까? 부부가 백년해로함이 이상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정리의 "닭살부부 1, 2, 3, 4, 5 호"들이 이를 생생하게 입증한다.

그러나 전혀 탈출구가 없을 적에는 이혼이라는 강단도 내려야 인생이 달리 풀린다는 사실을  친구의 이혼과 재산분할에 간여하면서 내가 터득한 결론이다.

 

그럼 너도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누가 벌써 내 다리를 붙들고 매달리는 느낌이 송연하다.  문정리 땅 기운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