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종일 을씨년스럽고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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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서울 가고 없으니까 한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이네 팬션에 마음 수련 온 사람들 (20여명) 밥을 해 주려니까 진이엄마랑 해도 바쁘다.

 

보스코가 무엇을 먹었나 무엇을 하나 궁금하여 시간마다 전화를 해댔다. 아침은 어제 사온 빵고 우유를 먹었단다. 점심에는 송총각이 새벽기도(아마 내 지난 일기 "가난한 사랑-2"와 연관된 기도인듯)에 다녀오면서 사가지고 온 죽을 한 그릇씩 먹었고. 송총각은 그 다음 인천의 교회로 시무를 나갔을 것이다. 저녁은 동네 이발소에 나가서 머리깎고 돌아오는 길에 그 죽파는 집에 가서 떡국을 사먹었단다. 때마침 그 떡국집에서 내 전화를 받은 참이었는데 전화기에 대고 "맛 없었어!"란다. 주인은 얼마나 무안했을까?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싶어 속으로 "많이 컸다."라고 했다.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라는 어른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나 못 믿어워서 "그냥 일어나 차타고 올라갈까?" 하고 밤새 몇 차례나 뒤척였는데, 안 올라가기를 잘한 것 같다. 그처럼 "무능의 지존" 내지는 아들들이 놀리는  "와이프-보이"가 사흘을 어떻게 앞가림하나 지켜보는 중이다.

 

오후에 뒷집에서 읍에 친구를 데리러 나간다고 했다. 가는 편에 파인애플 몇 통과 "쥐과자"를 사다달라고 했다. "쥐과자"는  쥐를 키우느라고 쥐 먹으라고 주는 과자가 아니다. 지난 가으내 대체 어디서 들어오는지 꼭 몇 마리가 나와 다용도실을 돌아다녀서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벌써 몇 마리나 "찍찍이"에 붙어서  다비식을 행했다. 아마 쥐들도 내가 매우 성가시고 무섭고 쩨쩨할 게다. "아유,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러슈. 혼자 넉넉한 것처럼 행세는 다 하면서... 좀 공존 좀 합시다." 하는 것 같다. 찍찍이에 붙어서 죽은 쥐를 다비식한 게 벌써 몇 번인지 모른다. 너무 싫다. 그때마다 보스코는 옆에서 "술란 상구이나라 Sullan Sanguinara"라는 이탈리아말로 나를 놀린다. "피를 보는 순란"이라는 단어다. "제발 이사비용 일체 다 물테니까 딴 데로 떠나만 다오." 하지만 쥐들이 음식이 있는 창고를 두고 이사갈 리가 없지.

 

진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2층으로 올라와 책을 좀 보다가 일기를 쓰고는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내다본다. 공허하다. 시인 신달자씨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지금 늘 혼잣말로 '비가 오네. 눈이 오네. 바람이 부네.' 그렇게 생각만 해.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 그에게 '여보! 비가 와.' 그렇게 말하고 싶어. 남편이란 게 얼마나 좋은지도 알겠어. 남편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이 글은 신혼 5년후 무려 24년간 남편의 중풍병 시중과 사나운 성깔을 지긋지긋하게 겪은 여자의 글이다. 그리고  그여자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아아,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고 싶어를 간절히 외치곤 했다. 여왕보다 혼자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어느날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런데 혼자라는 것은 하루에 몇 시간이면 족한 것이야. 나같이 할일이 많고 바쁘고 정신없이 뛰는 사람도 늘 마음에 찬바람이 불어. 다시 빈집으로 빈방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이야."

 

 

정말 보스코가 없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공허할까 갑자기 서늘함이 어깨에 가위눌린다. 배우자나 가족이 아무도 없는 사람들의 써늘한 가슴이 절절이 와 닿는다. "오늘밤이라도 차를 몰고 밤새 운전해서 올라갈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글제목이 다시 새삼스럽다. 

 

잠자리에 들어도 이갈고 코골고 푸푸거리는 ("보스코의 삼박자 축복"이라고 푸념하곤 했다.) 소리가 시끄러워서 이불을 뒤집어 써야했는데, 오늘은 그 소리가 이틀째 안 들리니 푸욱 잘 것 같았으나 그 적막이 되레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기찻길옆 오막살이에서 아기아기는 잘도 자나보다. 너무 오래 길들여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