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6일 금요일, 큰비


비가 많이도 온다. 오고 또 와서 우이천의 돌과 돌 사이에 엉키고 끼어있던 이끼를 말끔히 씼어내면서 흘러간다. 속이 개운하다. 이렇게 한번씩 큰물이 지고 나면 때로는 큰일도 나고 재산상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역시 사람들에게도 자연도 가끔은 뿌리부터 완전히 뒤집히는 계기를 만나는 게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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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휴천재 앞을 흐르는 휴천강이 그 아래 동강(방곡에서 흘러나오는 내와 합쳐져)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한남마을이 있다. 마을 어귀여서 다른 집 보다는 지대도 낮고 한길가에서 담배와 잡화를 팔던 구멍가게가 있다. 큰물이 내려 강물이 마당 앞 평상에서 찰랑거리는 광경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안팎 두 노인에 대한 내 걱정이 시작한다. 태풍 루사가 경남일대를 강타했던 그해에는 강이 둑을 넘어 그 집 가게와 문지방을 넘어 장농과 그 속에 이불과 옷가지, 냉장고, 텔레비전까지 순식간에 물에 담궜다. 한 달 가까이 노부부의 가난이 그 집 마당 빨랫줄에 걸려 있어 지나는 모든 행인들에게서 '가난 검열'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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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변함없이 지금까지 그 터 그 집에서 가게를 하는 노인에게 그렇게 혼나시고 집을 옮길 생각이 없어요?’ 라던 내 물음에 답변: ‘6.25사변 때도 살아남았수.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요.’ 두 분의 달관 앞에 내 걱정은 꼬리를 내린다.


그렇다. 사람 목숨만 건진다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핵폭탄이 터진 자리에도 쑥이 쑥쑥 자라나고 바퀴벌레도 기어다니더라는데... 


엊그제 만난 신목사님은 월남전에 파병되어 직접 전투를 벌인 지역을 금년 50여년만에 방문했단다. 전쟁의 상처는 당한 사람만큼 가해자도 파괴하는 법,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히던 기억을 안고 찾아간 그 지역은 전쟁의 참화를 모두 이기고 전혀 다른 평화로운 도시가 되어 있더란다


악행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먼저 파괴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찰이 있지만, 월남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하고 유린한 파월장병들은 지금도 그 정신적 트라우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내 주변에서 여럿 목격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패하고 돌아왔으면서도, '고엽재 전우회'라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고엽제를 퍼붓던 미군을 규탄해야 할 텐데 손에 성조기를 들고 흔들면서 현정부의 남북화해를 규탄하는데 목청을 높이는 행태에서 그 트러우머의 집단적 발병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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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근 의원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위원장이 되어 옮긴 사무실의 경치가 기막히다면서 '목우회' 친구들을 초대했다. 늘 바쁜 사람이라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나누고 두세 시간 정담을 나누는 게 전부였지만 그미와 30년 넘은 세월로 묵은 정은 각별하다. 새 사무실을 찾아간다고 송데레사 언니는 떡을 해가고, 나는 어제 제주에서 선물받은 밀감을 들고 갔다. 작은 선물로도 고마워하는 인의원의 모습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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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원 책상 앞에 젊은 시절의 김근태 의원 사진이 놓여 있었다. 포항의 어떤 노동자가 김의원의 도움에 감사해 30년간 가슴에 품고 다녔던 사진인데 이젠 인의원에게 보내드릴 수 있게 되었다면서 보내왔단다. 한 노동자의 가슴 속에 30년을 자리할 만한 따스한 인물이 바로 정치가 김근태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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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문대통령과 인의원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있었다. 작은손주가 그 사진을 보고서 "김근태 할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데 이 할아버지는 또 누구에요?" 채근하더란다.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일러주었더니 "김근태 할아버지 하고 누가 더 높아요?" 묻기에 "김근태 할아버지가 조금 더 높단다." 했더니 "그럼(사진 같이 찍어도[?]) 됐어요." 하더라나? 꼬마의 기억 속에서도 여태 '인재근 할머니'의 곁을 지키는 건 '김근태 할아버지'다(우리 작은손주도 나더러 '전순란 할머니'라고 함자를 그대로 부른다,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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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 아무데도 못 가는 시아 시우는 빵고삼촌이 사준 레고 '어부의 집'을 조립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범이 무얼 할 때 큰아들 시아를 보조로 쓰듯, 시아는 동생 시우에게 쉬운 일을 시키며 둘이서 잘들 논다


스위스에 갈 때는 저렇게 고생하여 조립한 건물을 다시 부숴 조각내서 가져가야 하겠지만 '파괴는 또다른 건설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애들은 모래성을 쌓고 헐고 다시 쌓는다, 그러면서 인생에서는 그런 일이 연속된다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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