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1일 화요일,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


새벽까지 내린 비로 잎에 앉은 물무게를 감당 못해 마당의 비자나무가 허리를 기역자로 꺽었다. 아예 머리를 땅에 박았다. 패랭이와 섬초롱은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꽃송이에 인 빗물이 무거워 일어날 수 없다고 엄살. 그래도 엊그제 옮겨 심은 수세미와 바질은 빗속에 튼실히 뿌리를 내리며 타고 오를 줄만 있으면 당당히 오르겠다는 채비다.


보스코는 아침식사 후 굵은 밧줄로 비자나무 다섯 가지를 곁에 있는 상나무 기둥에 묶어 주었고 나는 패랭이꽃에 출렁이는 빗물을 일일이 털어주었다. 날이 들자 정원의 초목 전부가 이틀간의 단비에 포식했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한결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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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신여동문회 여동문들이 선배와의 만남을 갖는 날. 일년에 한 분씩 찾아뵙고 지난 시절 언니들이 한신캠퍼스에서 겪은 스토리를 엮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날. 오늘은 1937년생 이문우 언니를 찾아뵙기로 한 날


언니가 각별히 만나고 싶은 후배로 전순란, 한국염, 오성애, 한선희를 꼽으셨다는데 한가하고 만만한 전순란만 선배 앞에 나타났다. 한국염 목사는 여교역자총회로 익산에 가고, 한선희는 미국 갔고, 오성애는 심장이 안 좋아 움직이기 힘들어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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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숙, 유영님, 강성혜, 서애란, 문화령, 전순란 여섯이 만나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이문우 언니네 아파트로 갔다. 얼마 전에 들어온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살고 계셨다. 언니는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처럼 고요하고 선한 사람, 그야말로 평화의 아침을 여는 여인이다.


당신은 하늘의 사람, 사랑의 노래를 갖고 온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슬픈 것들을 감싸는 이

잠든 이들을 깨우고 평등세상을 여는 이

새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우뚝 서 계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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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그 당시는 김포)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전쟁 중 장티푸스로 돌아가시자 그래도 살 만한 집안에서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공부에 욕심이 많아 숙명여고엘 갔고 중대 약대를 가자 할아버지가 소를 팔아 학비를 대주셨다. 하지만 시골에서 대학교 학비를 대는 일이 수월치 않아 세 학기 만에 휴학을 했단다. 그러다 이두섭 목사님의 권유로 한신대 2학년으로 편입학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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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학교 당해년에는 장학금이 없어 1년 후 다시 휴학을 하려는 참에 같은 학교에 다니며 언니를 흠모하던 총각이 등록금을 내주어 한 해를 넘겼단다. 그러다 언니의 사정을 아시던 이우정 선생님이 당신도 미국 유학 중 타인의 도움으로 공부하셨다면서 이문우 언니를 거두어 당신 집에서 숙식을 제공해 주시고 총회장학금으로 공부를 계속하게 주선해 주셨단다.


4학년말 등록금으로 빚을 진 김달수 목사와 연애를 시작하여 결혼했고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도 도시산업선교’, ‘원폭피해자돕기운동’, ‘히타치불매운동’, ‘기생관광반대운동’, ‘미군철수운동을 벌이면서 한국 기독교 안에 가부장적인 성서 해석에 맞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구속자가족돕기월요모임을 시작했고, '교회여성연합회' 총무, ’새가정사총무로 일했다. 그렇게 가정과 일을 양립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언니. 그 사이 남편 김달수 목사님은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강남대 교수를 역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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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80이 넘는 나이에도 꼿꼿하고 정갈하고 맑은 정신은 여전하시다. 하느님이 언니의 인생에 맡겨주신 마지막 밋션으로 남편수발이 남아 있지만 언니의 얼굴은 하도 해맑아서 그림자 하나 없다.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언니의 남은 날들이 조금 더 유쾌하기를 하느님께 빌었다.


보스코는 살레시오수도회에서 청춘시절을 함께 보낸 벗들을 만나러 대전엘 갔다. 각기 사정이 있어 오늘은 구프란치스코, 노수사(여덟 형제간에 두 누나와 막내가 수녀, 바로 밑 동생이 인천교구 사제니까 여덟 형제 가운데 다섯이 수도자요 성직자다), 김보니파치오, 그리고 보스코만 팔순 노인들로 만났단다. 장태산 휴양림에서 멋진 밤을 지새며 추억의 얘기들을 풀어내고 있을 시각이어서 내게는 모처럼 한가로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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