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일 월요일. 기온 급강하, 눈발이 날리고 눈비가 오고 저녁에는 대체로 개였음

 

새벽에 일기예보를 들으니 내일은 영하 5도란다. 그렇담 내 밭의 채소들과는 영영 이별 아닌가?

벌떡 일어나 밭으로 내달렸다. 피만과 고추를 따고 아욱, 근대, 쑥갓, 케일, 꽃상추, 호박닢, 애호박 등 아직 생명이 붙어 있을 적에 모조리 따고 뽑았다. 보스코도 덩달아 내려와서 고추대를 전지 가위로 잘라서 원두막으로 옮겼다가 다시 다용도실로 옮겼다. 그러면 고춧닢과 풋고추는 서리할 수 있으리라면서... "9시에는 떠나야 담양 천주교묘지에 제 시간에 도착할 거야."라는 경고도 잊지 않고서...

 

비올 확률이 0%라고 예보하고 있는데도 창밖에는 벌써 눈발이 내리고 있다. 첫눈이랄까? 아침상을 대하면서 눈구경을 하였다. 빗방울이 좀 지더니 눈발로 바뀐 것이다. 많이는 아니고...

올 겨울은 기습한파와 눈이 많을 거라는 예보도 있어서 이 창에서 저 산자락에 눈내리는 낭만을 많이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시 정각에 휴천재를 나와서 담양으로 향했다. 인월, 88고속도로를 거쳐 담양 묘지에 도착하니 10시 45분! 눈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눈개비가 쏟아지는데도 자가용들이 많이 와 있고 갑자기 미사를 야외에서 실내로 바꾸어선지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주교님 세 분이서 공동으로 돌아가신 모든 성직자들과 교우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집전하였다. 윤공희 대주교님, 최창무 대주교님, 김희중 대주교님의 모습은 마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함께 집전하는 미사 같아서 너무도 보기 좋았다.

 

자리가 전혀 없었는데 다행히 한 구석에 설 자리가 있어 의자를 넘어 들어갔더니 친절하게도 아주머니가 의자도 하나 줬다. "이리 앙거!" 오랫만에 듣는 따스하고 정든 말씨였다(나는 결혼 초 3년을 광주에서 살았다). 최창무 대주교님의 강론은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는데 어미닭이 차례로 달걀이 굴려 자리바꿈을 하면서 품어주는 예를 들고, 알 속의 병아리와 어미닭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즐탁동시(???)를 인용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호응을 아울러 가르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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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후 점심은 대주교님이 초대해 주셔서 담양 대나무 박물관 앞 박물관 식당에서 사제단 일행과 함께 대통밥 점심을 들었다. 최창무 대주교님은 헤어지기 전에 내 손을 붙드시고 작은아들의 서품 전에("서품 후에 말고") 가톨릭으로 입교하여 아들 손에 영성체 하기 바란다는 당부를 해 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드렸다. (사실 보스코는 내 입교 준비차, 그 동안 나의 유아세례 증명서와 개신교 세례예식문 확인서를 확보해 두었다.) 대주교님의 자상하신 배려가 참 고마웠다.

 

우리와 한 상에서 점심을 드시는 김성용 신부님은 우리 집에 오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완도에서 담양 미사에 오신 참이었다. 그분은 1973년에 우리 결혼을 주례하셨다. 내가 개신교 신자여서 관면혼배를 해야 했는데 자녀의 가톨릭신앙교육이라는 조항에 내가 한사코 버티는 바람에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를 설득하느라고 한참이나 애먹은 얘기도 해주셨다. 나는 아이들이 커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신교든 구교든 선택케 하자는 주장이었고, 신부님은 교회법대로 자녀는 무조건 가톨릭신자로 입교시키고 교육시키겠다고 서약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쉬운 내가 손을 들었고, 빵기와 빵고 둘다 가톨릭신자로 자란 것은 참 잘 한 일이다.)

 

보스코에게는 아버지와 같으신 살레시오회 마신부님,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요 신학전망 편집인(그러니까 보스코 첫 직장의 직속 상사)  서인석 신부님, 보스코의 동창 강영식 신부님이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월산동 본당 주임 김성용 신부님과 함께 우리의 혼인미사를 집전하셨다(한신대 CC 약혼자와의 혼인을 한 주간 앞두고 가출한 딸이 주례 사제 4명을 세우고 혼인미사를 올리는 사진첩을 보고서 이모들은 엄마에게 "딸 하나 똑똑하게 잘 뒀구려!"라는 부러움섞인 비아냥을 했다던가?). 네 분의 주례 사제 중에서 다른 세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김성용 신부님은 빵기의 세례도 월산동 집으로 오셔서 집전해 주셨다.

 

그 뒤로 김신부님을 처음 뵙는 셈이다. 37년만의 해후에서 신부님 머리는 하얗게 셌고, 은퇴하신지 여러 해였고, 완도 바닷가에 "수강재"라는 한옥을 짓고 은거중이셨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투옥과 박해에 대한 보상금이 조금 나와서 그 돈으로 집을 지으셨다고 얘기해 주셨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그때는 "광주사태")의 주역으로 옥고와 온갖 고초를 겪으셨음에도 정정하셨다. 3년후면 서품 금경축을 지내신단다.

 

김성용 신부님은 내년이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라서 독일에서 온 통신사들과 인터뷰가 있어서 보스코가 함께 광주로 갔다가 휴천재로 모셔오기로 떠났고, 나는 구례로 가서 바오로딸 네 명을 데려오기로 하였다. 원래는 내일 천왕봉에서 백무동으로 내려와 우리집에서 일박하기로 했는데 노고단 산장에서 한파와 눈으로 길이 막혀 구례로 퇴각한 참이었다.

 

사복 차림에 베일 대신 모자를 쓴 게 몹시 마음에 걸렸던지 어떻게든 신부님 일행과의 조우를 피하려고 저녁식사에 오지 않겠다고 버티더니 한번 와서 신부님을 만나서는 홀딱 반해버렸다.

저녁식탁에는 8명이 둘러 앉았는데 김성용 신부님, 20년 넘게 신부님을 보살피는 아나다시아씨, 바오로딸 중진인 벨라데타, 프란체스카, 안칠라, 용팔이 체칠리아 수녀, 그리고 우리 부부였다. 이 수녀님들이나 그 윗선이 장상이었을 적에 바오로 가족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지금은 바오로 가족과 좀 소원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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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후 "용팔이"(본명은 김용해) 수녀님의 원멘쇼와 오라토리오 발표에 모두들 배꼽을 쥐고 웃었다. 모두가 식탁에서 함께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고 나서 수녀님들은 강건너 팬션으로 내가 데려가고, 신부님 일행은 우리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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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다만 담양 미사후 너무 급히 구례로, 광주로 달려가는 바람에 묘지에 계신 마신부님, 기신부님, 오수사, 강영식 신부의 산소에 성묘할 시간도 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다시 한번 담양으로 성묘가야 할까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