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맑음

 

빵기가 제네바에서 자기 장모님 편에 보낸 선물이 택배로 도착하였다.  초콜렛, 비스킷 그리고 구슬파우다였다. 사부인께 잘 받았다고 전화드렸더니 그곳에서 보내신 얘기와 아이들의 얘기를 들려주시는데 손주 시아에 관한 얘기가 제일 많았다. 아이가 얼마나 영특한지 모른단다. 우리 할머니들은 누구나 손주 애기가 나오면 절제를 잃는 주책이 된다. 사부인 쪽으로는 외손주, 내 쪽으로는 친손주여서 둘이서 맞장구를 쳐가면서 시아 칭찬을 하느라고 "돈 드릴 게 손주 얘기 좀 그만 하실래요?"라는 말 안 듣고 실컷 얘기할 수 있었다.

 

사부인 입에서 아들 칭찬이 나오거나 손주 칭찬이 나오면 나도 브레이크가 안 걸리고 덩달아 내달리는 것을 보면 나도 여자요 할머니임에 틀림없다. 보스코가 내 전화를 염탐해서 빵기에게 전해주면서 내가 염치없이 자식 자랑이나 한다면서 둘이 웃을까 봐 침실에 와서 몰래, 안심하고, 실컷 전화를 했는데 어쩌다 보스코도 들었던 모양이다. 내일이면 아들이 나한테 한 마디 하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누가 저더러 잘 나래?"

 

점심 식사후 멧돼지들의 집들로 시찰을 나갔다. 제1시찰 대자 이기자네집, 제2시찰 스테파노씨 집, 제3시찰 석형씨네 집터로 차례까지 정하고 도정으로 올라갔다. 낼 모레면 11월인데도 셔츠가 덥다. 길가에 여름에 예치기로 베어버린 쑥부쟁이들이 다시 자라 땅에 붙어 잔디처럼 깔려 예쁘게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잎을 떨군 감나무들은 그 화려한 색깔과 자태로 늦가을의 여왕으로 돋보였다. 꽂감 깎기가 두렵다는 글라라씨 눈에는 눈의 여왕처럼 으스스할까? (하기사 오라버니의 말에 의하면, 작년에 두 동 반 한 꽂감을 세 동으로 올리자고 남편을 충동질하는 편이 다름 아닌 글라라씨라는데.) 여기저기에 코스모스 자취도 남아 있고 산국은 골짜기 전부를 차지하고서 사방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기자는 석형씨집 콘크리트 치는데 울력을 나가 없고, 글라라씨는 읍내에 장보러 가고 없고, 아랫집에 친정어머니와 오빠만 있었다. 얼마전에 그 집으로 입적한 네눈박이 진돗개 하봉이가 어디서 딩굴었는지 온 몸에 도깨비방망이가 박힌 채로 반갑다고 내게 문질러대는데 아예 하봉이가 도깨비방망이다. 바지에서 그 침을 빼내느라 애를 먹었다. "짜식, 쥔 대신 손님 대접 하나 제대로 배웠네."

 

이기자네 배추밭엘 내려가 보았다. 무우는 제법 알이 들었고 배추는 김장을 하려면 아직 분발해야겠다. 우리 배추도 그 집에서 모종을 얻어서 심었으니까 그집 배추 농사가 덜 되면 우리것을 나눠줘야 할까 보다. 우리가 내려간다니까 "우리들의 오라버니" 토마스2씨도 배낭을 메고 하산한단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단다.

 

스테파노씨 집에 들르니 남정네는 감동에서 꽂감 걸게를 엮어 걸고 있고 아낙은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고구마를 얼마나 터프하게 캤는지 보스코가 보고서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놀렸다. 고구마 목아지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부러진 것은 봐 줄만 한데 할복자살까지 한 고구마들은 전쟁터의 상이군인들 같아 모두 보고 웃었다. 까닭인즉 체칠리아씨의 고구마 추수를 돕겠다고 부산에서 오신 "형님"이 생전 처음 고구마를 캐는지 사정없이 삽질을 했나보다("고구마폭행자"는 손목에 팔찌 안 차나?). 

 

그집 배추는 이엠비료 덕분인지 우리 것보다 더 잘 자라고 있었다. 무는 내 다리만큼 굵고 통통하다. 무 여섯 개를 뽑아 주길래 깍두기 담아 나누기로 하고 스테파노씨에게 집까지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보스코는 운동 삼아 "오라버니"와 걸어내려오라고 차문밖으로 내가 밀어냈다. (둘이는 오다가 문상마을 정자에서 한 시간 가까이 얘기를 하다 늦게사 내려왔다.)

 

체칠리아씨가 준 무로 깍두기를 담아서 체칠리아네, 진이네, 우리 것 삼등분하여 담아 놓고 나니까 밤 11시다. 좋은 밭에서 막 뽑아 바로 담근 김치여서 맛이 기가 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