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맑다가 오후부터 흐려지기 시작

 

"가을은 외로운 석류의 계절"이라고 누가 노래 불렀더라? 그 사람 여기 지리산 자락 문정리에 와 보라지. 추위가 오기 전 다람쥐 알밤 물어 나르듯 문정 사람들은 한겨울 먹을 것을 장만케 해 줄 곶감 깎기에 여념이 없다. 어딜 가나 감 얘기다.

 

"얼마치 샀어요?" "여태까지 얼마나 깎았어요?" "얼마나 물렀던가요?" "얼지는 않았나요?" "일손은 잘 돌아가나요?" "며칠이면 끝나요?"

 

그래서 감이 지천이다. 휴천재 창틀 쟁반에도, 냉장고 속의 접시에도, 원두막 소쿠리에도 말갛고 예쁜 홍시들이요, 저온창고에도 감이 수십상자 쌓여 있고, 덕장에는 깎아서 매단 감들이 수십접씩 아름다운 색갈을 뽐내면서 줄줄이 달려 있다. 애써 일하고 매단 사람들은 물론이겠지만 보는 나도 풍성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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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놈의 감 때문에 스테파노씨는 입술이 터지고 첼리아씨는 발목이 삐었고 진이엄마 막딸은 머리가 가려워도 팔이 올라가지 않아서 긁지를 못한단다. 글라라씨 왈, "시골만 함께 내려가주면

이기자가 나를 공주님처럼 모시겠다고 골백번 언약했는데,  공주님은커녕, 작년과 올해만 보더라도 내 평생 이렇게 일을 많이 해 본 적이 없고 남편이 나를 이렇게 많이 부려먹은 적이 없다."

지리산에 내려온 아낙치고 남편에게 이런 립서비스 내지 공수표 안 받은 사람 있을까? 부부는 서로 consorte('운명을 함께 하는 사람')이니까 어쩌겠나? 더구나 소담산방 블로그에 날마다 오르는 지리산 사진들을 보면 글라라씨의 지리산 사랑이 담뿍 베어 있는데 말이다. 어떻든 공주님들이 요새 곶감일로 중노동을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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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글라라씨 오라버니는 내가 처음 보았을 적에 비해서 훨씬 건강해졌다. 지게 가득 나무를 짊어지고도 이제는 무릎이 후들거리지 않는단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 짐만은 아닌 성 싶다. 모두를 기쁘게들 사는 품이 노동은 또한 기쁨이기도 해서일 게다. 꽂감 노동을 않는 나는 진이네 점심 준비나 하고 어쩌다 체칠리아씨가 준 무로 반찬이나 만들어 돌리는 게 내 기쁨이다.

 

채지를 갖다 주려고 이기자네에 갔더니 어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신 내색이다. 까닭을 물으니 작은딸이 일손 도우러 왔다가 갔는데 "안녕히 계세요." 해놓고는 차타고 가면서 어머니한테 손도 안 흔들어 주고 한번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연이었다.

우리 빵고가 휴가를 끝내고 갈 적에도 엄마인 나는 대문 밖에 나가 골목 끝까지 가서 아이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아들은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 남편 같으면 "여봇!"하고 한번 불러서 억지로라도 뒤돌아보게 만들 텐데 아들이라서 서운하면서 가슴앓이를 할 뿐이다.

정말 자식은 앞을 보고 걸어나간다. 아니, 앞만 보고 간다. 부모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제발 비칠거리지 않고 걷고, 제 짝을 만나고, 자식을 낳고, 제 앞가림을 하면서 마냥 걸어가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끊기지 않는 사랑의 실타래를 푸는 일로 만족해야 한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도 짝사랑이고(아쉬울 때 이것저것 보채는 기도 외에 우리가 언제 하느님 생각하던가?), 부모의 자식 사랑도 짝사랑이고(우리가 하는 자식 생각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 보시라. 100대 1이나 될까?)....

 

어머니를 달랠 겸 내 맘도 위로할 겸 떠나오면서 어머니에게 손 흔들고 발 흔들고 머리까지 흔들어 드리니까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으신다. 어린아이의 웃음이다. 우리도 하늘이 가까울수록 얼굴과 웃음이 저렇게 해맑아지면 좋겠다.

 

스테파노씨 감동에는 어제처럼 도정 큰애기들 셋이 와서 열심히 감을 깎고 있었다. 오늘만 지나면 끝이 보인단다. 한 이틀 더 하면 된단다. 아내의 일 욕심이 겁나서 감동 천정을 일부러 낮게 지었노라는 스테파노씨의 장난기어린 표정은 정말 "귀엽다." 체칠리아씨는 채지를 반가워했다. 자기집 무운데....  "열심히 감깎고 산에 가야 할 텐데 발이 이래서..." 체칠리아씨는 벌써 마음이 산에 가 있다. 소쿠리에 홍시를 가득 얻어 갖고 돌아왔다. 도정 이웃들의 따사로운 정도 한 소쿠리에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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