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4일 수요일, 구름끼맑다 하였고 달은 여전히 휘영청 밝음

 

아침 7시 네 수녀님들을 백무동에 데려다 주었다. 용감한 여인들이다. 돌아오는 길에 하림닭 두 마리를 사서 "옻닭"을 하였다. 감동에서 고생하는 꿀벌 부부와 일손으로 수고하는 가밀라 아줌마와 문상  강수영씨댁 아줌마에게 조금이라도 몸보신 되는 점심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닭고기에서 기름은 떼내어 가출에서 바짝 말라서 돌아온 풍우에게 주려고 진이네 부엌 가스불 위에 올려놓은 채 다용도실에서 호박닢 손질을 하고 있다가 집안에 연기가 가득해졌다. 보스코가 냄새를 맡고서 (그는 모든 감각이 둔한 데 냄새 하나는 잘 맡는다.) 소리를 질러서 달려갔다. 지글지글 불타는 기름기를 바깥으로 내가다 마루와 현관에 쏟아서 청소하는데도 무척 애를 먹어야 했다. 기름기여서 불꽃으로 바뀌어 타고 있었으니까 하마터면 옆의 벽이나 가재도구에 옮겨 붙을 뻔했다. 집안의 모든 창문과 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켰는데도 저녁 늦게까지도 메뚜기 구워먹은 냄새가 집안에 온통 배어 있다.

 

오늘 같은 날은 내가 일하는 장소가 이층 부엌, 바깥 다용도실, 그리고 일층 부엌 세 군데가 되었으니 사고를 칠 만하다. 지난번 추석에도 다용도실에서 일하다 진이에 부엌에서 끓이던 인삼대추차를 다 태우고 말았다. 앞으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나도 걱정이다. 나이들어 기억마저 가물가물해진다면...

 

오후에는 배추를 묶어 주었다. 처음에는 바깥 잎사귀를 깨끗이 따 줬는데 동네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배춧닢 한 장이 이불 한 장 폭"이란다. 그래도 너무 꼭 매거나 해서는 안 되고 영하의 날씨에도 겉닢 속에서 잘 보관되고 알이 잘 차도록 하라는 가르침이어서 한 포기씩 내가 무릎을 꿇고 끌어 안고서 싸주다 보니 내가 그야말로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헤아려보니 106포기였다. 잎이 제법 찼다. 아직 벌레가 있거나 진닷물이 찬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사람들도 10% 이상은 병들어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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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칠선의 "청산별곡" 파비아노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광주리 농원"의 김사장님이 우리 부부와 당신의 지우들을 초대했단다. 문상마을에 사는 윤교장선생님도, 인천에서 온 두 분의 친구도 함께 청산별곡 입구에 기다리고 있어서 함께 광점동으로 올라갔다.

 

산정에 아담한 마을이 있고, 사람들은 광주리 농원 주인은 "사장님"으로 부르고 주방과 요리를 책임지는 부인은 "회장님"(아주 후덕한 인상을 주었고 사람들이 누구나 "미자씨"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이라고 경칭하였다. 염소불고기를 먹었는데 참 담백하고도 맛 있었다. 앞으로 우리집 손님들을 모셔올 곳이 하나 생겨서 좋다. "칠성산장" 선사장님도 인사차 잠깐 올라왔다 갔다.


특히 광점동 꽂감 얘기가 나왔는데 "등구 마천 크네기(큰애기)들은 꽂감 깎으러 다 나가고"라는 노래가 있을만큼 마천일대의 "고종시"가 작지만 씨가 없어서 맛이 일품이라는 얘기였다. 금년에는 마천고종시 반건시도 맛봐야 겠다. 서로 주변 얘기와 담소를 하다 9시가 다 되어 자리를 떴다. 임선생님이 준 검정쌀을 한 되박 얻고 교장선생님과 친구분을 문상마을에 내려놓고 집에 오니 아홉시 정각이다.

 

"오늘은 정말 좀 쉬자. 한 달에 하루 정도는 11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 보자." 단단히 작정했건만 오늘 밤도 집안을 정리하고 보니 11시 40분이다. 보스코는 여늬 때처럼 침대에서 코를 골고 있다. 그는 정말 잘 먹고 잘 자는 순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