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맑음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커틴을 걷으면서 햇님이 떠오르는 왕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틀만에 만나는 햇님이 정말 반갑다. 겨울일수록 반가운 것이 태양이다. 오늘 아침 햇님은 구름 사이에서 자기 얼굴을 보여줄까 말까 망설인다. 서울 어디에서 우리가 이처럼 아침 햇살을 만끽하면서 살았던가? 30년 넘게 산 우이동에서는 삼각산으로 해 지는 풍경은 날마다 보았지만 해뜨는 풍경은 옆산이 가리고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떠올라 집안에 햇살이 들이비출 즈음이 아니면 햇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는 동남쪽 왕산에서 매일 아침 해 뜨는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정말 산청 왕산의 매일 아침 풍경은 우리 이웃 "소담산방"(http://blog.daum.net/g2sodam)에 매일 올려지는 사진들을 볼 만하다)

 

 해 돋기 직전의 왕산 DSC08966.jpg

 

김장을 담갔으니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야지...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밥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라고? 먼저 사부인께 전화를 했더니만 두 아들네 것까지 해서 스물 다섯 포기를 담그셨단다. 김장을 하는 서울 사람들은 그래도 부지런한 편이다. 이제는 간장, 된장, 고추장 모두 사먹고 김치도 모든 종류를 가게에서 골고루 사먹을 수 있으니 굳이 김장을 하려들지 않거나 아예 김장할 줄을 모른다.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해 주시는 김치들을 먹으면 모를까....

 

큰올케는 작년에 담근 배추김치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것을 먹을 참이고 알타리무 두 단만 사서 그것으로 김장을 했단다. 지난번 오빠가 우리집에 왔을 적에 김장김치 속에 함께 익은 갈치를 골라 먹으면서 너무너무 좋아하던 모습이 비친다. 그래서 큰올케한테 가는 배추김치는 갈치가 많이든 쪽들을 골라서 쌌다.

 

나는 오빠가 무척 좋다. 로마에 살 적에도 꿈속에서 오빠랑 커다란 연못 바닥에서 고구마를 캐고는 잠에서 깨어 전화를 했더니만 "땅에서 캔 게 그냥 고구마도 아니고 군고무마야?"라고 크게 웃었다. 세살 터울인 오빠는 유난히 나와 친했다.

 

어려서 아이들이 하학하고 집에 가버리면 교장 사택에 우리만 남으니까 우리끼리 놀이를 찾아내야 했다. 오빠랑 막내 호연이가 한 편을 먹고 나와 호천, 순행이가 한 편을 먹고 레슬링을 곧잘 했다. 때로는 오빠는 심판을 보고 나와 순행이가 한 편, 호천이와 호연이 두 사내아이가 다른 편이 되어 칼싸움, 자치기, 제기차기, 사방치기, 공기놀이를 남녀 안 가리고 놀았다.

 

어느 핸가 부모님이 출타하고 안 계시는 동안 소사 아저씨에게 우리를 맡겨놓고 가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조개탄과 감자로 무기를 정해서 신나게 전쟁놀이를 했는데 집안이 온통 조개탄 깨진 것과 감자로 아수라장이 되어 소사 아저씨를 거의 기절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검투사 놀이를 시키면서 나는 허리띠로 상대방을 공격하게 하고 호천이한테는 연필을 길게 깎아 창이라고 쥐어주면서 결투를 시켰는데 결투 중간에 연필 심이 부러졌는데도 휴전을 시키지 않아서 호천이는 자기가 불리했고 나한테 너무 많이 얻어터져 억울하다고 발을 동동거리면서 울던 적도 있었다. 다음에 보니까 그 연필심은 내 가슴 한 가운데 꽂혀 있었고 예순이 된 지금도 그 자리에는 그 연필심 자국이 까맣게 남아 있다. 역시 탄소는 오래 가나보다, 어린 날의 추억처럼....

 

내가 지금도 이렇게 극성맞고 보스코에게 "인조인간 전순란 마징가 젯"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어렸을 적에 갈고 닦은 그 전투 경험 덕택이 아닌가 한다. 지난 번에 만난 중학교 동창들이 "순란이 너 사람 됐다. 너 참 순해졌다."고 나를 놀릴 정도였다. 중학교까지 사내아이처럼 지냈던 기억 때문이었다. 

 

안성여고를 다니면서도 뭔가를 곧잘 잊곤했고 늘 늦곤 했는데 안법고등학교 다니던 오빠는 늘 내 가방을 챙겨들고 뛰었고 늘 내 가방돌이 역할을 해주었다. 대학교 다닐 적에는 오빠의 술친구였고(오빠가 워낙 술을 못 마셔서 오빠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으레 끼어서 오빠 몫까지 내가 마셔주었다.) 한 달 용돈을 타면 내 돈이 제일 먼저 떨어졌고 그때마다 오빠는 자기 용돈을 아껴서 내게 건네주면서 "여자애는 머리도하고 스타킹도 사 신고 하니까."라고 하였다. 심지어 군대에서 휴가 나온 오빠가 용돈을 찔러주면 그것도 좋아라고 받아 썼는데 참 속없는 동생이었다.

 

이제는 환갑이 넘고 오빠의 이빨은 여나믄 개가 망가져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처지가 되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우리 오빠는 나에게 특별히 착하고 좋은 오빠였다. 요즘도 가끔 오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여 "오라버니, 안녕하신지요?" 라는 농담인사로 시작해서 얘기를 주고 받는다.

 

 왕년의 전씨집안 투사들: 호천, 나, 두 사람(호연의 아들과 올케) 건너 호연,

두 사람(호천네 올케와 어머니) 건너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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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순행이에게도 한 통 싸 보냈다. 작은 올케한테서도 한 통 얻었다니  순행이네 올해 김장 김치는 그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다리도 아프고 건강도 안 좋은 동생이라서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

 

그리고 두상이 서방님네  올케(박경미)에게도 한 통을 보냈다. 두상이 서방님이 심장 수술을 해 준 어느 시골 환자가 김장에 쓰시라고 멸치 내린 젓갈을 한 통 보내왔는데 어떻게 처리할 줄을 모르겠다면서 지난 가을 나에게 싣고 온 적이 있었다. 이번 김장은 바로 그 젓갈로 담근 것이었으므로 그 집은 한 통 받을 권리가 있다. 첼로 레슨으로 온통 바쁘고 또 아파트에 사니까 올케는 김장하기도 쉽지 않을 게다. 특히 내 김치가 먹고 싶다는 올케이니만큼 나의 김치 팬 관리 차원에서라도 보내 주어야지...

 

이렇게 대한통운 아저씨에게 세 통을 싸 택배로 보내고 나니까 내가 세 통을 받은 것보다 기분이 훨씬 더 좋다. 내년에는 좀 더 많이 해서 나눠먹어야지. 그럼 내년에는 배추를 더 많이 심어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