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8일, 화요일,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대축일, 아주 맑음

 

함양 시장에 갔다. 배추야 보스코가 농사를 잘 지어놓았고 무우는 동네에서(이장님댁에서, 까밀라 아줌마와 마르타 아줌마한테서) 얻었지만 내일 김장을 하려면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았다. 과일집에서 도마도(아침마다 한개씩 먹는다.)를 사고, 지난 가을에 배추 모종이 안 좋지만 가져다 심겠느냐면서 거저 준 아줌마를 찾아가서 그 배추 잘 키워서 내일 김장을 하게 되었노라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니가 준 모종이 오히려 겉이 얇고 속이 노래서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 이기자가 준 모종도 좋은 것이었는데 우리가 너무 비만형으로 키운지 모른다. 물론 맛 있다.

 

"우리 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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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차부에 가서 삼천포 일성상회 아줌마가 새벽시장에서 구해 버스로 보낸 해물을 찾았다. 갈치 2만원, 생낙지 2만원, 생새우 2만원, 황새기 1만원, 그 집 회 3만원어치를 산 것이다. 택배비 1만원. 그러니까 11만원에 삼천포 앞바다를 한 아름 안은 셈이다. 그이들이 이 생선들을 잡아올리고 여러 사람의 수고가 내게까지 전달되었다는 게 고맙다. 특히 전화 한 통화로 부탁하면 내 일처럼 처리해 주는 일성상회 아줌마는 착한 언니다. 이것들로 내일이면 김장을 해서 겨우내 여러 사람과 맛있게 나눠먹을 참이다. 지리산 겨울이 갑자기 따사롭고 풍요하게 느껴진다.

 

배추는 70포기쯤인데 얼마나 포기가 잘 들었는지 4분의 1 쪽이 다른 것 하나 몫은 될 때도 있다. 진이 엄마도 "머리에 털 나고 이렇게 김장을 많이 해 본 것은 첨"이라면서 신나했다. 우리 집에서 엄마는 보통 150포기나 200 포기를 했는데.... 어떻게 그 많은 것을 해내셨을까 이제야 새삼 감탄이 된다. 그래서 엄마가 저렇게 빨리 늙어버리신 걸까?

 

엄마나이 40대의 사진을 보면 지금의 내 얼굴보다 더 거칠고 더 늙어 계셨던 것 같은데.... 하기야 엄마는 애 다섯을 키웠으니 내 수고의 두 배 반은 하신 셈이고 애들마다 얼마나 엄마 속을 태워드렸던가! 그중에서 가출하거나 사고치지 않아서 제일 범생이었던 내가 마지막에는 마치 만루 홈런을 치듯이 결혼 일주일 앞두고 가출을 해버렸으니... "너같은 딸 열 명만 낳아라!" 하시던 엄마의 저주도 진심으로 하신 것 같지가 않다. 속썩일 딸은 커녕 착하디 착한 아들만 둘을 하느님께 배급받았고, 둘은 한번도 엄마 속썩이는 일 없이 저렇게 자라서 제 몫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DSC08939.jpg  점심에는 배추를 가지러 통영의 글라라씨가 왔다. 꿈틀꿈틀 나를 째려보던 문어 두 마리와 도미 세 마리, 스파게티꺼리 바지락, 거기다 통영 특산물이라는 꿀빵까지 두 상자나 사 왔다. 이건 완전히 배보다 배꼽이다! 거기에 함양까지 오가는 기름값을 친다면 통영에서 배추를 샀던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겠다. 다행히 진이엄마가 꿀 한 병을 선물해서 내 미안한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다. 정말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계산만으로 살지 않는다. 계산 없이 주고 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랑 아니고 뭔가! 글라라씨도, 진이엄마도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표정이 밝은 통영 양글라라씨와 함께  DSC08942.jpg

 

                                                                                                                                      루치아씨, 남편, 대모님과 사촌 언니

DSC08947.jpg 양글라라씨가 떠나자마자 함양 루치아씨가 남편과 함께 종을 가지러 왔다. 자기 대모님도 언니도 같이 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성탄절에 부제품을 받는 아들의 교수님들에게 선물로 드릴 것이다. 로마 우리 대사관에 늘 민속품을 대주던 한국공예의 임부장이 옛 정을 생각해서 지금도 도매 이하의 값으로 물건을 보내준다. 그렇게 "에밀레종" 다섯 개를 택배받아 두었는데 아침에 함양 나가면서 루치아씨에게 가져다 주겠다고 전화까지 하고서는 깜빡해서 그들이 가지러 온 것이다. 이젠 정말 많은 것을 잊고 넘 잘 깜빡한다. 보스코와 더 친하게 지내야 그의 도움으로 사람 노릇을 할 것 같다.     

 

성모님 대축일인 오늘은 며느리의 생일이다. 보스코가 며느리에게 약간의 축하금을 보냈는데 그냥 피자를 사다가 잔치를 대신했단다. 어제 40도의 열이 오르내려서 유아원에 결석했던 시아는 병원에 데려갔는데 별다른 이유가 없었단다. 그래서 오후에는 잠시라도 유아원에 가서 제 친구들을 만나게 해야겠단다. 스카이프는 언제나 영상을 보면서 저 먼 제네바까지 무료로 통화를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한참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배추를 절였고, 그 담에는 일층 마루에 앉아 진이엄마와 둘이서 양념꺼리를 다듬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니까 정말 김장하는 기분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