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7일, 월요일, 날씨 아주아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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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김장을 준비하러 텃밭에 심은 배추를 뽑았다. 보스코가 칼로 뿌리를 자르고 내가 떡닢들을 떼어내고 손질을 하였다. 시장가는 장바구니 수레로 보스코가 건강원에 가져다 쌓았다. 우리의 첫농사가 속이 꼭꼭 들어찬 100여 포기의 배추로 결실되어 나와 보스코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장에서는 좋은 포기도 하나에 1000원이면 산다고들 하지만, 내가 가꾸어 얻은 이 소득을 무엇에 비하랴! 어느 백화점에 5억원을 주더라도 이런 행복감과 만족감을 사올 수 있겠는가! 김장은 60여 포기를 하고, 30여 포기는 남겨서 충무에 사는 양글라라씨에게 주기로 했다. 아들 셋 중에 둘을 마산교구 사제와 신학생으로 내놓고(10월 21일자 일기 참조) 열심히 사는 교우다. 특히 우리와 문정공소신자들을 얼마나 극진히 대해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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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나는 내 평생 가장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내 소녀시절의 친구 영애, 거의 40년 세월의 강을  건너서 여고동창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가슴이 콩콩 뛴다.

 

영애, 그녀는 커다란 연못 연닢 위에 사색의 커다란 눈을 껌벅이는 개구리였다. 내가 안성여고에 입학하던 해 걔는 2반이었고 나는 1반이었다. 같은 문예반에서 만났는데 걔는 늘상 우리보다 한 단계 높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듯했고,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문학의 세계에 도달해 있었다. 시라면 시, 수필이라면 수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했던 것은 걔가 시나 수필 옆에 그려놓는 삽화였다.

 

늘 밝은 웃음을 그 큰 입 가득히 담고 언제라도 까르르 터뜨리곤 했다. 걔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걔를 훨씬 더 좋아했다. 2학년이 되어 나는 일산고등학교로 전근하신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가끔 걔 소식을 전해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대학을 다닐 때 한두번 만났고 내가 4학년이 되어서야 걔 아버지가 도봉 시장 안에 문방구를 하면서 다시 영애와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영애 엄마가 걔 고3때에 돌아가셔서 네째딸이던 영애는 대학 진학을 못한 채였는데 그때도 꿈을 잃지 않고 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보스코와 열애에 빠졌을 적에 상담사 노릇을 해 준 것도 걔였다. 내게는 캠퍼스커플로 사귀어온 약혼자가 있었고, 집을 마련했고 살림도 들여놓았고 청첩장을 돌렸고 주례자를 모셔놓은 처지였다. 결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집에 그대로 있다면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집을 나와 보스코를 따라나섰다. 그 절박한 처지에서 내 얘기를 들어주고 충고를 해 준 것은 영애였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보스코가 걷던 길에 마지막 말미를 한번 더 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를 본 가족들의 절망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다시 집을 나온 나는 딱이 갈 데가 없어 친구 영애를 찾아갔다. 영애는 원덕에 아는 집이 있었고, 내가 얼마 동안 그곳에 가 있게 주선해 주었다. 보스코가 찾아오더라도 내가 있는 곳을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영애에게 부탁하였다.

 

과연 몇 주간 뒤 보스코가 영애를 찾아왔다. 예전에 나랑함께 영애네 약국을 찾아간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간 곳을 물었다. 영애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딱 잡아 뗐다. 그러더니 그가 애절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서는 불러세우더란다(여자의 눈에 사람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대개 '뒷모습'이다). '보스코가 정말 순란이를 필요로 하는 남자로구나!' 하는 직감이 들더란다. 그래서 내가 있던 곳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보스코가 원덕으로 나를 다시 찾아왔고, 그해(1973) 10월 3일 우리의 결혼은 이루어졌다.

 

나는 영애가 좋아 늘 가까이 함께 살 수 있으려니 해서 보스코의 단짝 친구 수복씨에게 소개해 주었다. 수복씨도 영애가 좋았던가 보다. 그런데 이 남자의 프로포즈가 미숙했다. 자기와 결혼하면 공부도 계속하고 문학소녀의 꿈도 펴게 돕겠다는 약속을 한 것인데 그 말이 자존심 강하던 영애의 속을 뒤집어 놓고 말았다. 영애는 그 프로포즈 편지를 내게 보여주면서 펄펄 뛰었다. 워낙 잘 살던 집안의 넷째딸로 자존심이 하늘 같던 걔한테 시혜쪼로 들린 그 프로포즈가 싫어서 영애는 수복씨와 단절했고 나와의 관계도 싹둑 잘라버렸다.

 

나도 보스코도 그동안 영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게는 가장 친한 여고동창을 만나고 싶어서, 보스코에게는 나와의 인연을 다시 이어준 고마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얼마전 졸업후 45년만에 중학교 은사 이강주 선생님을 찾아 뵈오면서 다시 끈이 이어졌다. 이강주 선생님이 그때 약국하던 영애의 언니가 당신의 친구라고 하시기에 영애 소식을 알 수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찾아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물어물어 영애 언니와 연락이 닿아서 언니의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주셨다. 언니에게 당장 전화하였고 언니는 내 전화번호를 영애에게 전해 주마고 하였다.

 

드디어 어제 저녁 영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37년만에!

 

우리가 헤어지고 얼마 뒤 걔는 미대에 진학하였고 생활미술로 디자인을 전공하여 남대문에 들어가서 열심히 다지인하고 장사도 하여 생활비를 벌었단다. 내게는 남대문 천주교 공동체에서 일하던 데레사 언니라는 분이 있는데, 10여년전, 내가 들은 풍월로 영애에 대한 프로필을 말하고 근황을 물었을 적에 "체칠리아라는 여자가 그 사람 아닌가 몰라." 하셨는데, 이번에 전화로 확인한 바로는, 그 체칠리아가 바로 영애였다. 그때 그말만 유의해 듣고 서둘렀어도 10년은 앞당겨 걔를 만났을 텐데....

 

영애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가 남편은 현지에 두고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지금 세검정에 살고 있단다. 아직도 글쓰고 그림도 그리고 여전하단다. 성탄을 지내러 서울에 올라가면 당장 달려가서 만나야겠다. 벌써 가슴이 뛴다.

 

내 소녀시절의 우상이던 이영애! 어느 소설처럼 "나의 사랑하던 안토니아!"가 아니기를 비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소설의 주인공이 젊은 날의 열기를 식히고 먼훗날 중년이 되어 찾아본 안토니아는 아이 여덟을 안고서 딩굴며 닭장에서 일하다 나와 주인공을 맞이한다. 그러나 나의 안토니아면 어떠냐?

 

옛친구에게서 전화가 왔고 만나고 싶어 마음이 설렌다는 내 얘기를 듣고서 어떤 분은 가능하면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옛 벗의  변한 얼굴과 모습을 보던 순간, 내가 저렇게 변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서 자기 모습을 거울에 보는 듯한 섬득함을  느꼈노라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의 얘기가 사실이라도 나는 영애를 보고 싶다. 그동안 우리가 제각기 건너온 머나먼 세월의 강을 함께 돌이켜 보면서 걔가 살아온 얘기를 함께 풀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