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사나운 돌풍과 진눈깨비가 지리산 골짜기를 흔들다

 

창밖으로 안개비가 오는가 했더니 순식간에 눈발이 되어 베일처럼 날려가면서 앞산의 속살을 신비스럽게 감싸는 풍경이다. 아, 아름답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답다! 내 동생 호천이는 전화를 해서, 이제 모든 것을 놓아야 할 누나 나이라고, 서울집 지리산집 다 처분하고 양로원에나 가서 해 주는 밥 먹고 편히 지내라고 호통이다. "매형 나이는 물론 누나도 이제는 손님들 왕창 불러다가 '뽀다구나게' 대접할 때가 지났다. 손님이 오거든 길건너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켜다(마천에서는 배달을 안 해주는데...)  먹이고, 커피도  종이컵에다 맥심 한 봉지 타주면 되지 모슨 엑스프레스냐? 상가에나 결혼식에도 10만원, 5만원 부주할 때가 아니다.  2, 3만원만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다. 놓아라! 다 놓아라!" 동생의 훈계는 이렇게 이어졌다.

 

눈발로 비단안개를 두른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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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셔츠에 단추를 달았다. 보스코의 셔츠 하나가 너무 낡아서(우리 친정 아버지가 70년대에 입으시던 옷이 언젠가 우리 집에 와서 지금까지 보스코가 입었다.) 버리겠다고 했더니, 보스코가 그것과 색갈이 비슷한 내 셔츠를 가져다가 단추나마 쓰겠답시고 카터로 일일이 단추를 떼 놓았던 것이다. 그의 산만한 주의력과 분별력은 가히 지존급이다. 사진의 두 옷의 무늬도 구분 못하다니 그는 색맹일까, 꼴맹일까?

 

보스코가 단추를 떼어 놓은 내 셔츠                  낡아서 버렸어야 할 보스코 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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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좀 더 굵어진다. 실루엣은 그 깊이를 더해 간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하느님이 내게 허락하셨을 적에, 나는 하느님 손에서 감사히 받아들였고 그에 상응한 나의 보답이 있다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저 아름다운 눈발 앞에서 새삼 다짐한다. 땅을 파고, 채소를 가꾸고, 이웃과 벗들을 불러들여 밥상을 함께 하고, 내 삶을 이웃과 나누면서 담소하는 지리산 삶이 나는 마냥 좋다. 하늘의 새와 땅위를 기는 벌레와 밤하늘의 별과 달, 해와 구름, 들에 핀 꽃과 흐르는 휴천강 물줄기와 뺨을 스치는 바람과 저 눈송이와 특히나 사랑하는 남편 보스코[보스코가 이 자연 사물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그리고 내가 손을 뻗으면 맞닿는 모든 생명과 하느님이 주신 숨결을 사랑하고 섬기고 누리면 살고 싶다.  내 마지막 숨결이 다할 순간까지 사랑의 종으로 살 수 있다면야 얼마나 행복한 처진가!

 

오전에는 이처럼 꿈같은 생각에 잠겨 보냈는데 오후 2시 반경는 눈보라를 뚫고 집을 나섰다. 내일 보스코가 강연을 하는 천안에 보스코를 남편의 친구이자 대자인 종수씨에게 맡기고 나는 서울로 떠났다. 천안에서 거의 세시간이 걸려서 집에 도착하니 송총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불침번 서는 일을 소홀해서 도둑이 들었다는듯이 그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이 집에서 제일 값나가는 게 송총각인데 그 귀중품이 다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뜯어진 문고리도 그냥 두라."고 했다.

 

이층에 올라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어질러 놓았다. 도둑이 뒤진 자리도 내가 귀중한 것을 넣어두지 않는 곳이었다. 도둑과 나 사이에는 "귀중품"에 대한 개념이나 이해가 달랐던 것 같다. 또 값나가는 물건은 아예 없었으니까. 십자가 금목거리, 큐빅이 박힌 진주목거리를 비롯해서 금붙이 한 웅큼이 전분데 그것을 털어갔을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내 옷장을 샅샅이 뒤졌다는 섬찍함 외에는 별다른 원통함도 없었다. 경찰이 "생계형 도둑"이라고 했다는데 문들을 무지막지하게 뜯어낸 것을 보면 전문가는 아닌 성 싶다.

 

도둑님이 뒤집어 놓은 내 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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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밤늦게 와서 신고서를 받고 접수해 갔다. "내 물건을 도로 찾고 싶고, 범인을 잡으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으며 생계형이라면 내가 뭘 도울수 있는지 알고 싶다. 상습범이라면 사법기관이 생각할 문제다."라는 요지로 신고서를 적었다. 신고를 받고 신속히 대응한 경찰과 감식반에 감사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없어진 것에 대한 미련도 별로 없다. 사람이 인생을 떠나면서 다 놓고 갈 터인데 그까짓 장신구 좀 없어졌기로 속 끓일 게 뭔가. 호천이 말대로 "놓아라!"를 새겨야 할 나이다. 놓아야 할 것과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해서 받아들일 나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