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일 목요일, 날씨 흐릿하게 밝음

 

어제 삼봉산 임도를 걸으면서 구해온 솔잎으로 대림초를 꾸몄다.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옵소서..." 성가의 구절대로 기다림은 아름답다. 크리스마스날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나 연인들처럼, 내가 지금 정말 순진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는 것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삶이 축제처럼 아름답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도 들꽃을 꺾어다 꽂고, 오늘처럼 솔잎을 꺾어다 대림초를 장식하고, 이웃들과 식빵이나 케이크를 구우면서 즐겁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미소짓고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게 생동력을 주면서 내 삶을 밀어붙이는 힘이 기다림이 아닐까? 만일 그것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기다려지지 않는 갇힌 마음이 되어버린다면 그때는 내 삶이 얼마나 회색으로 바랠까? 

 

오늘 저녁 기도를 함께 바치러 오는 동네 친구들을 기다리고, 내일 점심에 온다는 사람들도 기다려지고, 다음 주에 점심을 들러 찾아오겠다는 송기인 신부님도 기다려진다. 6일에 보스코가 천안 신부동 성당에 가서 할 강연이나 13일에 마산 남성동 성당에서 할 강연도 기다려진다. 나는 운전기사로서 항상 그와 함께 가니까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는 확연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DSC08849.jpg

 

나는 어린 소녀 시절을 안성 공도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공도중학교 교장이었고 오후에는 학교 뒷산의 무덤가에 젖짜는 양을 몰고 가서 매일 풀을 뜯겨야 했다. 학생들이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학교는 더할나위없이 조용했고, 무덤가에서 책을 읽으면서 지내는 석양무렵은 한없이 적막하고 외로웠다. 시골 산속에 갇혀버린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멀리서 내게 오고 있는데, 내가 갈 곳은 더 먼 곳인데." 하면서 막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무언가를 꿈꾸던 세월이었다. 무덤가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책을 던지고 벌렁 누워서 쳐다보던 하늘, 맘대로 흘러가던 구름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때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DSC08852.jpg  그 뒤 처녀시절, 연애를 할 적이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고 (김소월의 "비단안개"라는 시에는 "두 눈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는...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요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하는 구절이 있다.) 그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미치도록 기다렸고, 방금 헤아져 돌아오면서도 집에 혹시 그에게서 부쳐진 편지가 와 있나 우체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한 기다림이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사랑에 뿌리내린 무엇이이었다. 결혼식을 기다리고 태어날 아기들을 기다리고 손자의 탄생을 기다리고 하면서 삶이 고비고비 넘어가는데 지금도 여전히 기다림으로 나의 하루하루가 채워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하느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늘 찹찹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던 말이 이것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우리 마음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이런 기다림은 한없는 갈증을 채워 줄 영원한 세계가 따로 있다는 표지임에 분명하다. 

 

창밖으로 박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하던 일을 마저하고 화장실 두 개를 청소하고나니까 머리에 얼키고 설키던 생각들이 말끔하게 씻어진다. "엊그제도 청소를 하고서 또 청소야?" 보스코는 자기 서재로 내가 진공소제기를 몰고 들어가니까 짜증을 낸다. "깔끔하고 부지런한 마누라 둬서 복터지는 소리 할 테요?" 하고 핀잔을 주었다.  내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는 책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벗겨져가는 뒤통수를 나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바라봐야만 한다.  

 

                                                                                                                      문정공소 교우들의 소성무일도

DSC08845.jpg 저녁 7시 반. 마천 베드로씨 부부와 그 집에 요양온 부산 교우 부부가 우리와 소성무일도를 함께 바치러 왔다. 토마스가 초청했나보다. 뒤이어 글라라의 오라버니와 글라라 부부, 체칠리아 부부, 막달레나 부부, 우리 부부 하니까 13명이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 시편 기도를 바쳤다.

 

로사리오도 한 단 바쳤다. 우리 식으로. 로사리오 한 알마다 기도지향을 넣어가면서 장미 한 송이씩 엮는 방식인데 재미있는 점은 사람마다 바치는 지향이 지난번 기도 모임 때의 것과 거의 같다는 점이다. 아마도 많이 생각하고 본인에게는 그만큼 간절한 지향인 듯하다. 막달레나는 자기 아이들을 위해, 이기자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스테파노씨는 특이하게도 노숙자를 위해서 기도하곤 한다. "혹시 과거에 노숙자가 되어 본 경험이 있어요?" 하고 장난삼아 물어보고 싶은데 보스코한테 눈총을 받고 본인이 내 농담에 민망해 할까 봐 차마 묻지 못했다. 오늘은 노숙자 대신에 독거노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이렇게 짧은 기도 시간이지만 각자의 관심 세계가 공유되는 게 좋다. 또 각자가 염려하는 문제가 이뤄지기를 함께 기원하는 마음들이 자그만 공동체를 이룬다. 더군다나 기도후 치즈케익과 둥글레차,  막달레나가 사온 과자와 과일을 들면서 환담하는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이런 기도 모임은 자주 할수록 좋겠다.

 

보스코의 서재에서 소성무일도를 마치고 로사리오를 바치는 문정공소 교우들

DSC08848.jpg